"예전에 엄청난 혁명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이제는 모든 시대에 대해 보수적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논란이 될 만한 것도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한 삶의 문제들을 드러내기 위하여."(13쪽)
그렇다. 비록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나치에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정치에 야합하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보수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기득권을 양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헐벗고 힘들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상한 사상적 누명을 씌워 자꾸만 벗기려하는 왜곡된 기독교를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혁명가가 필요하다고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2000년 전 예수는 혁명가로 오셨다. 교권과 정치적 야합에 침몰한 유대사회에 칼을 던지러 오셨다. 불덩이를 던지러 오셨다. 급기야 유대 교권주의와 정치권력에 야합한 종교주의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위치와 권력을 내려놓을 수 없어 무참히도 예수를 짓밟았다. 결국 예수는 반란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형을 받고 죽어가야만 했다.
그리스도인이여, 혁명하라!똑같은 이야기는 나치 독일에서도 전개되었다.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본회퍼에 의해서 말이다. 일제시대 그들의 압제에 항거하기보다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며 정치 권력화했던 우리나라의 기독교,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굽신거리며 물신의 지배자에게 박수를 맘껏 쳐댔던 기독교, 지금도 보수라는 미명하에 양심적 신앙을 모토로 여기며 사는 몇 안 되는 신앙인들을 향하여 무차별 사상적 쇠사슬을 얽어대는 교권주의자들, 그들을 향하여 삶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몇이나 될까.
디트리히 본회퍼는 여전히 살아서 오늘을 사는, 너무도 평안하게 사는, 나를 포함한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무대로 나오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신앙적 양심을 따라 책임 있게 산다는 말이다.
"악한 일이 일어난다면,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악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악행에서 벗어나도록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15쪽)본회퍼가 이런 말을 할 때만 해도 세기의 악, 히틀러가 그렇게 죽을 것이란 생각은 그 어느 누구도 못했을 것이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본회퍼의 말은, 그의 행동하는 기독교적 양심의 근저에 사랑이 깔려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사랑하기에 악을 보고 참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행복보다 고통에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란 본회퍼의 시각은 기득권에 취해, 풍요로움에 취해,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한국의 교회와 교권주의자들을 향해 고통과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의 한 가운데로, 불구덩이 한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 고통이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줄 것이기에….
간결한 문장, 뜨거운 외침"본회퍼의 글은 저에게 천 길 낭떠러지에 동아줄과 같습니다. 그의 간결하지만 힘 있는 이 메시지들을 통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저와 같이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추천 글처럼 글이 너무 간결하여 시편 한 권을 읽는 느낌이지만 그 속에 잠재된 외침은 뜨겁기 한량없다. 속으로부터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뜨거운 핏줄기가 솟아 나온다.
과거를 살아 낸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며, 미래를 살아갈 그리스도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책임 있게. '현재에서 도망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란 본회퍼의 시각은 현재, 한국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준다.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질문이 책의 제목이다. 독일 귀터스로허 출판사의 만드프레드 베버가 본회퍼의 잠언들을 여기저기서 파내어 이 한 권의 책에 옮겨놓았다. 물량주의와 정치 권력화의 두터운 성에서 침몰해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외로운 혁명가, 본회퍼의 외침이 지금이라도 살아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 '국제제자훈련원'의 용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의외란 생각을 했다. 출판사와 본회퍼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 선입견 때문에. 하지만 이런 선입견조차도 본회퍼가 살아낸 고통의 신앙적 책임이 없어서일 것이란 자책을 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하여 물고 늘어진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생각 속에 갇혀 살아왔으며 모든 일을 미리 심사숙고하기만 한다면 그다음 일들은 저절로 따라 올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늦어버리고야 말았을 때, 행동의 원천은 생각이 아니라 책임감이란 사실을 배웠습니다."(38쪽)"책임과 자유는 서로 통하는 개념으로 책임은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자유는 오직 책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주어지는 인간의 자유가 바로 책임인 것입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행동은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창조적이라 할 수 있지요."(48, 49쪽)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 책임을 다하라본회퍼가 제안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일 보다는 고통을 택하고, 안전을 추구하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엄청난 모험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진정한 평화가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목적이나 그렇지 않은 삶의 목적이 같다. 그것은 승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승리여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애초부터 안일함이나 평안함 하고는 거리가 멀다. 안일과 평안, 풍요가 지배하는 '교회의 승리' 개념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본회퍼는 짚어준다. 한국교회는 안녕한가? 너무 평안하다. 그게 문제다. 평안이 일시적 쾌락이나 가져다주고, 풍요를 가져다줌으로, '축복의 반석'을 깔고 앉아, 고통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게 문제다.
한국교회는 '축복의 반석'에 거대건축을 지어놓고 앉아서 피 끓는 이들의 고통에 귀를 닫는 게 문제다. 물론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본회퍼는 성경조차도 '처음부터 쉽게 이해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르며 모든 면에서 낯선 곳,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고자 정해 놓으신 바로 그 장소'라고 정의한다.
번역자가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Freibeit zum Leben)'라는 원제를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로 번역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 속한 영역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명을 다할 때 자유롭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교회는 너무 안일하다. 그 책임을 '보수'라는 이념 속에 묻고 행동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정말 기독교는 비겁한 게 아닐까?
지금도 살아서 한국교회를 향하여 책임 있는 행동의 현장으로 나오라고 촉구하는 본회퍼의 외침을 그의 시편 일부를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어둠 속으로 가져오신 당신의 촛불
밝고 따듯하게 타오르게 하시며
생명의 빛 칠흑 같은 밤에도 빛을 발하니
우리로 다시 하나 되게 하소서."(57쪽)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