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에 정착한 지 2년째. 1년에 한 번씩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고흥군민들이 자손대대로 물려줘야 할 위험천만한 유산, 핵발전소 건설 추진이라는 날벼락을 막아 낸 지 1년도 채 안 된 1월 6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고흥군에 대규모 유연탄화력발전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로우주센터 인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고흥군은 대내외적으로 청정고흥을 자랑할 때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지붕없는 미술관'에 화력발전소라니, '지붕없는 미술관'과 '화력발전소'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까? 최소한의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핵발전소는 청정에너지'라는 발상과 너무나 닮았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화력발전소 건립 추진 소식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지난 한해 동안 나와 함께 글쓰기 공부를 했던 나로도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이었다. 화력발전소를 추진하는 예정지가 바로 그 아이들의 생활 터전인 나로도 봉래면이다. 나는 지난해 일주 일에 한두 번씩 나로도 아이들을 만나러 갔었다.
나로도 대교를 건너 봉래초등학교 방과후 논술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들떠 있었다. 그 길에는 푸른 하늘 푸른 바다가 있다. 학교로 들어서면 하늘과 바다를 닮은 아이들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함을 내보이는 아이들, '놈' '녀석' '이~씨'조차 큰 욕설이라 여겨 XX로 표시할 정도로 순박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한 없이 행복했다. 때로는 몇몇 천덕꾸러기들과 화를 내고 다퉈가며 눈물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 녀석들과 티격태격하다 보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 뒤 끝에는 녀석들을 닮은 푸른 바다가 있었다. 푸른 하늘이 있었다. 때로는 푸른 바다로 낮게 내려앉은 검은 비구름, 붉게 노을 진 바다, 붉은 하늘이 기분좋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로도를 오가며 이런 기분 좋은 마음자리를 맛보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그런 나로도에 대규모 유연탄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겠다니.
고흥군민들은 지난해 핵발전소 건설 추진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핵발전소 건설과 함께 천문학적인 사업 자금이 쏟아진다는 사탕발림에 현혹되지 않았다. 핵발전소 건설을 통해 누리게 된다는 경제적인 혜택보다는 자손대대로 물려줄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을 선택했다.
그 청정고흥을 지키기 위해 군민들은 힘겨운 싸움을 했고 관망하고 있던 군의회를 움직였다. 그리고 지난 2011년 2월 7일. 군의회는 다음과 같은 원전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동안 원전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료 수집과 검토, 유치지역 현장방문, 각계각층 군민의 여론 수렴 등 다각적인 활동을 심도 있게 진행하여 왔습니다. 그 결과, 원전유치는 각종 세재혜택과 지원사업 등 재정적 인센티브와 고용창출, 인구유입 등의 효과는 다소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고흥의 장기적인 미래를 생각한다면 청정 이미지를 지키고 가꾸는 것이 더 값지고 소중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원전유치로 인한 청정 이미지 훼손은 우리의 주력 산업인 농수축산물의 선호도를 떨어뜨려 판매부진과 소득감소를 유발하고, 청소년체험시설, 나로 우주센터, 우주과학관등 집적화된 청정 과학시설이 랜드 마크(Land-Mark)가 되어 부상할 장차의 관광수요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지난 80년대 원전유치 반대를 위한 소모적 갈등이 지역 발전에 많은 부작용을 끼쳤었던 선험적 교훈을 깊이 새기면서, 원전유치와 관련한 더 이상의 반목과 대립은 군민의 화합과 발전을 저해할 뿐이라는 판단하에 고흥군의회 의원 전원은 '원전유치를 반대한다'는 신중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성명서 일부핵발전소 유치를 만장일치로 반대했던 군의회 성명서는 대다수 고흥군민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불과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나로도 우주센터 인근인 봉래면 마치산 해변 300여만㎡에 4000㎿급 유연탄 화력발전소(1000MW급 4기) 건립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핵발전소는 곧 청정에너지라 운운하던 사람들이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일까? 화력발전소는 유연탄 1톤당 1.7톤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에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인식되어 왔다.
화력발전소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핵발전소와 사용 원료만 다를 뿐 자연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기오염, 중금속, 열폐수 배출에 따른 바다 오염, 송전선로 건설 등으로 심각한 환경 문제와 민원이 발생한다는 것은 선진국과 주변 화력발전소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핵발전소 반대 견해를 밝혔던 고흥군 의회의 성명서에서처럼 화력발전소가 들어선다면 청정 이미지가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고, 주력 산업인 농수축산물의 선호도를 떨어뜨려 판매 부진과 소득감소를 유발할 것이다. 청소년체험시설, 나로 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등 집적화 청정 과학시설이 랜드마크가 되어 부상할 장차의 관광수요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듯하다. 또한 화력발전소 추진 과정에서 분명 군민들의 반목이 발생할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바로 이런 일들을 우려해 핵발전소 건설 추진 반대 성명서를 냈던 군의회였다. 성명서를 냈던 일을 까마득히 잊은 걸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군민들의 갈등이 크게 불거지기 전에 당연히 반대의사를 표명해야 하는데, 1월 20일 현재까지 화력발전소 건설에 대해 아무런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18일. 군의회 대신 고흥군 민주시민단체 사람들이 '청정고흥을 지키기 위한 군민 행동'의 이름으로 화력발전소 건설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이들은 나로도 봉래면에서 포스코에 화력발전소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봉래면 지역 주민들을 만나 확인한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화력발전소 유치를 위한 단 한 차례의 설명회도 없었다. 오직 포스코에서 제공한 1쪽짜리 자료뿐이었다. 봉래면 발전에 필요하며 보상도 많이 해준다는 과장되고 허황된 눈속임이 있었고, 유치 추진위원들의 강압적인 서명 강요가 있었다. 마을에서 화력발전소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TV나 외부 사람들에게 듣고서야 알게 된 주민들이 많았다. 또한 놀라운 건 건설 예정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지역이라는 점이다. 또 일부는, 서명을 받으면서 본인 동의도 없이 명의를 도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며 홍보 및 서명지 수합 등 면사무소 직원이 적극 개입했다.
화력발전소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봉래면의 역사적인 사업이며 고흥군 지역발전의 운명이 달린 투자유치사업이라면 공개적으로,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했어야 옳다. 또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충분한 절차와 설명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되었을까? 이런 상황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청정 고흥을 지키기 위한 군민 행동'은 성명서를 통해 고흥군에 강력히 경고했다.
"고흥군에 요구한다. 봉래면 추진위원 50명의 명단과 유치 신청서 서명자 전체 명단을 공개하라. 추진위원들의 말대로 화력발전소 유치가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이며 자신들의 말대로 떳떳하고 당당하다면 무엇이 두렵고 거리낄 것이 있는가? 또한 화력발전소 유치 추진 과정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돼야 할 것을 주문하면서, 앞으로도 마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밀실 행정이 이루어진다면 대다수 군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 올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지난 한 해 동안 함께 글쓰기 공부를 했던 나로도 아이들이 떠올랐다. 비록 대도시 아이들에 비해 문화적인 혜택을 덜 누리고 있지만, 나로도 아이들에게는 오염되지 않은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있다. 아이들은 그 하늘과 바다를 노래할 때 나처럼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먼 바다로 나서는 어선처럼 거침이 없다.
'매일 아침 산책 나오면/ 해에 비춰진 푸른빛 바다/ 매일 저녁 산책 나오면 달에 비춰진 푸른 빛 바다/ 참 아름답다.' - 봉래초등학교 4학년 한수지.나로도 아이들은 바다와 늘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냥 푸른 빛으로 아름다울 뿐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 않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푸른빛 바다를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만약 화력발전소가 건립된다면 나로도 아이들은 더 이상 '참 아름다운 푸른빛 바다'를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다. 나로도 아이들은 나로도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다. 미래의 푸른 바다이고 푸른 하늘이다.
나는 아이들과 바다에서 기분 좋은 기운을 받고 있다. 그 기운은 나를 만나는 사람들로 이어져 조금씩 세상으로 퍼져 나걸 것이라 믿고 있다. 바다가 오염되고 하늘이 오염되면 아이들의 마음은 오염될 것이고, 내 마음자리 또한 오염되어 결국은 그 기분 나쁜 기운을 세상 널리 퍼뜨릴 것이다.
아이들이 마음껏 심호흡하고 뛰어놀 수 있는 무공해의 푸른 하늘, 아이들과 함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푸른 바다는 청정에너지다. 그 어떤 발전소에서도 뽑아내지 못하는 천년만년 꺼지지 않는 아름다운 에너지다. 이러한 무한한 에너지를 어떻게 나쁜 기운을 뿜어대는 화력발전소와 맞바꿀 수 있겠는가?
고흥군은 '고흥이 아름다운 건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다. 또한 청정고흥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지붕 없는 미술관'을 내세우고 있다. '지붕 없는 미술관'. 개발의 큰 상처 없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고흥 곳곳을 둘러보게 되면 과연 그러하다고 무릎을 칠 만하다.
만약 고흥군에서 군민들의 갈등을 관망하고 화력발전소 건설을 계속해서 추진한다면 '고흥이 아름다운 건 당신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그 대신 '고흥이 오염된 것은 당신이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지붕 있는 오염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하지만 고흥군민들은 이미 핵발전소 건설 추진 반대를 통해 '지붕 없는 미술관'을 지켜 냈다. '아름다운 고흥 사람들'임을 입증해 냈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천년 만년의 청정에너지를 선택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냈다.
따지고 보면 고흥 사람들이 지켜낸 것은 단지 고흥이라는 한정된 청정 지역만을 지켜낸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 자손대대로 물려줄 대한민국의 청정에너지를 지켜낸 것이다. 나는 그 힘을 믿고 있다. 핵발전소 건설 추진을 막아냈듯이 화력발전소 건설 또한 막아낼 것이라는 걸.
고흥에 정착한 지 2년째. 나 또한 나로도 아이들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를 닮은 그 아이들은 나에게 기분 좋은 청정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남녘 땅 전남 고흥에 정착한 지 2년째. 여름이면 선풍기 필요없이 바닷 바람으로 시원하고 겨우내내 냉이를 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따듯하다. 그만큼 그 어느 도시보다 전력 소비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