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래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손녀의 패딩점퍼가 고가의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 대통령 손녀가 걸친 외투 한 벌은 재래시장 상인들의 한 달 벌이를 훌쩍 넘어선다.
뿐만 아니다. 패딩점퍼의 값은 주 5일을 꼬박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달 월급도 훌쩍 넘어서는 금액이다. 새해 정초부터 부지런을 떤 이 대통령의 행보는 결국 재래시장 상인들을 조롱하는 꼴이 됐다. 이같은 상황은 지난해 11월에 발표된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새해 정초부터 불어닥친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량 정리해고 사태는 이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와 똑 닮아있다.
'새해 맞이 대량해고'에 나선 제주도교육청제주도교육청은 2012년 새해를 맞아 새 마음, 새 뜻으로 체제를 정비하겠다는 굳은 포부(?)를 가지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앞장섰다. 제주도 소재 학교의 급식조리원 1100여 명 중 30%가 넘는 384명(지난해 말 교육청 통보 인원)을 대량 정리해고 한 것.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따라 나머지 700여 명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해고를 받은 조리급식원들은 하루 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나게 됐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회련학교비정규직본부 이태의 본부장은 제주도교육청의 급식 운영방식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운영돼 온 체제"라고 평했다. 이 본부장은 "지난 2007년, 기간제 보호법이 발효되던 당시에도 제주도교육청은 학교급식 조리 종사자들을 무기계약으로 전환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리원 수준으로 채용해야 하는 분들을 조리보조원이라는 이름으로, 보다 적은 비용을 지급하고 채용한 거죠."제주도교육청은 조리보조원을 수익자 부담으로 학교 자체적으로 채용토록 했다. 비용은 교육청 예산이 아닌 학부모들의 급식비에서 충당했다. 이에 대해 이 본부장은 "제주도교육청이 학교 측으로 책임을 떠밀어 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제주도는 10여 년 전부터 학교 급식을 학부모 참여 봉사 형태로 운영해왔다. 처음에는 무임금이었다가 상시근로 형태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들을 파트 타임으로 고용해 최저임금 정도를 지급해 온 것이다.
6년 일한 일터인데 새해부터 나가라니...
6년간 한 학교에서 조리보조원으로 일해왔다는 최아무개씨. 올해로 53세라는 그녀는 제주도내 다른 조리보조원들과 마찬가지로 올해 초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학교로부터 받은 근무 평가지에는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10년 근속한 분도 해고 대상이 됐어요. 저희는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할 수 없어가지고…. 억울하죠. 억울해요…."인터뷰 내내 "어떻게 된 영문이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던 최씨는 결국 목이 메었다. 최씨는 "중간에 일을 그만둔 적도 없으며, 결근한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현재 받고 있는 임금은 한 달 70만 원 정도. 이것도 그나마 오른 금액. 이전에는 한 달에 45만 원, 50만 원을 받기도 했단다.
"임금이 오르기는 올랐거든요. 70만 원이 된 게 한 일 년 정도밖에 안 됐어요."그들은 근로계약서도 일 년 전부터 썼다.
"그 전까지는 쓰지 않았어요. 지난해 계약서 한 번 쓰고 이번에 계약해지 통보 받은 거예요."놀라운 것은 제주도교육청의 주먹구구식 학교급식 운영방식이 지난 10여 년간 아무 무리 없이 진행된 것. 최씨가 퇴직금을 받은 것도 한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제주도에는 퇴직금 관련 제도가 아예 없었어요."최씨는 제주도 내 학교들이 '원래'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처우개선 위해선 대량 정리해고가 필수?
제주도교육청은 이처럼 법적으로 반드시 지급해야 하는 부분까지 '생략'하는 것을 제주도의 특성 내지는 관행처럼 여기는 듯했다.
제주도교육청 평생교육체육과 학교급식담당 김정순 사무관은 제주도 내 학교급식 조리보조원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학교급식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하고 싶어도 못 하죠. 회사나 이런 곳들도 경영이 악화되면 인력을 감축하잖아요. (조리 보조원들 줄)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학부모들이 내는 급식비에서 나가는 것이니까,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인건비를 부담해야 하는)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정리하자면,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따른 조리원들의 처우개선은 비정규직 대량해고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제주도교육청의 입장에 대해 오한정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부장은 "교육청의 책임을 각 학교에 전가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예산 지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요. 제주도교육청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고, 학교장 재량으로 고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장 재량에 그냥 맡겨놓고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아무 책임 없다'며 손 빼고 있는 것이죠. 각 학교에 있는 무기계약직 처우개선을 이야기하면서 예산 지원을 적용하지 않으니, 한정된 예산에서는 (대량 정리해고가) 뻔한 것이죠. 인원수를 줄일 수밖에 없으니까요."비정규직 죽이는 '비정규직 종합대책'
지난해 11월 29일 발표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의 골자는 '비정규직 34만1천 명 중 9만7천 명을 무기계약직화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치 못한 마음으로 설날을 보낸 제주도 조리보조원 384명은 이제 하나둘 일터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다름 아닌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 때문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정리해고 돼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전체 인원의 30%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급식 조리 종사자 700여 명은 과중된 업무에 항의했다. 갑자기 384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교육청은 이에 대한 답으로 해고된 조리보조원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시 단시간 근로자를 채용토록 했다.
물론 퇴직금 지급이나 무기계약 전환 비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계약기간을 10개월 미만으로 설정했다. 이렇게 채용된 비정규직들은 2012년 말 다시 계약해지 될 것이다.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또 다른 비정규직들을 양산하겠다는 행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비정규직 죽이는 비정규직 종합대책'. 비정규직들의 새해는 잔인하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