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 차례상에는 조금 특별한 음식이 하나 더 올라왔다. 바로 홍동백서의 동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빨간 음식인 곶감이다. 얼핏 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곶감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꽤 정성들인 음식이었다.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곶감이 만들어지던 때를 회상하면, 지난해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께서는 친척들과 함께 감나무에서 감을 따 가지고 오셨다. 주먹만한 감들이 200개 가까이 있는 것을 보니 마음까지 풍성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감은 떫어 그대로 먹을 수 없었고, 곶감을 만들기로 했다.
감나무에서 바로 딴 감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붙어 상당히 더럽다. 그래서 감을 깎기 전에 감 표면을 깨끗이 닦아 주어야 한다. 감 표면에도 과일의 당분이 있었는지 여러 개 닦다 보니, 손이 끈적끈적해졌다.
어머니께서는 닦아 놓은 감의 껍질을 깎으셨다. 감이 자신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먹을거리로 변할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무엇이든 새롭게 변화하려면 스스로를 어느 정도는 버려야 가능한가 보다.
손질한 감의 꼭지에 실을 연결해 매달아야 한다. 실이 엉키거나 감과 감이 붙을 경우 곰팡이가 생기기 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매다는 동안 실수를 해서 몇 번 감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만일 지붕이 있는 집이라면 처마 밑에 감을 매달았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거실에 빨래건조대를 세워두고 그곳에 감을 매달았다. 습도가 높다거나 통풍이 안 되도 곰팡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창문도 잘 열어두고 감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2주 정도 지나자, 안에 있던 수분을 공기 중으로 날려 꾸덕꾸덕한 곶감으로 재탄생되었다.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곶감을 냉동실에 넣어 보관했다. 그리고 그 곶감을 몇 달 후인 설날, 차례상에 올렸다.
떫은 감이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한다는 쫄깃하고도 달콤한 곶감이 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환골탈태(換骨奪胎)이다. 떫은 맛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다른 단맛이 되었으니,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고 윤오영 수필가는 '곶감과 수필'이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곶감의 속성을 수필에 빗대어 설명했다.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仲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柿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은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필요하다. 위 글에 따르면 수필 역시 그렇다고 한다. 격동의 시기에 동양의 고전수필을 바탕으로 한국적 수필문학을 개척하였으니 그렇게 느낀 게 당연하다. 명나라 말기에 형식만 중요시 여기던 글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했던 원중랑(袁仲郞)의 사상을 따르고자 한 노력도 엿보인다.
그러나 꼭 수필에만 해당되는 생각은 아니다.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떫다면 읽는 이가 부담 없이 받아들이도록 그 껍질을 벗기고, 말리고, 손질을 해서 종이에 담아내야만 참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야 오래가는 글이 될 수 있다.
출판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하루에도 몇 권씩 새로운 책이 서점에 진열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정작 읽을 만한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에 올라도 반짝 인기를 얻다가 어느새 사라진다. 어쩌면 빨리빨리 문화가 글도 그렇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올 한 해에도 많은 책들이 나올 거다. 양보다는 질을 원한다. 많기보다는 깊은 생각에 의해 써진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비록 많은 손질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이 되려면 필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