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이하 '조례')가 공포됐다. 이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교과부의 대법원 제소까지 요구돼 법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로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먼저 교과부의 법적 대응은 광주나 경기에서 이미 비슷한 내용의 학생인권조례가 공포·시행되고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의 문제라고 판단돼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우려와 반대의견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성적 지향, 임신·출산 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조항이나 집회의 자유를 허용한 조항과 관련한 것이다. 이를 우려하는 이들은 이러한 조항이 명시됨으로써 동성애나 청소년 임신 등이 확대·조장될 것이며 학생들의 무분별한 집단행동이 빈발해지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해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한다.
둘째는 학생인권조례가 안 그래도 힘든 학교 현실에서 교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의거한 우려 혹은 반대 의견이다. 이 두 의견은 사실 전혀 다른 성격의 견해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와 제11조 ①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21조 ①항의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는 조항으로 답을 대신한다.
다만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이제야 학생들에게 명시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너무 늦어도 한참 늦은 일이라 이제라도 그나마 아이들 앞에서 떳떳한 어른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반대 의견의 두 번째 주장은 개인주의와 자기주장이 강한 요즘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예전처럼 교사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는 학교 현장을 고려한다면 일견 타당한 문제 제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숨어있다. 첫 번째 오류는 교권과 학생인권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육의 어려움의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 교권과 학생인권은 서로 대립되는가?교권과 학생인권을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행위 자체를 훈육이나 군대식 훈련과 같은 것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교육이라는 행위 자체는 그 출발에서부터 학생과 교사 간의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일이다. 교육은 일정한 정보들을 일방적으로 아이들 머리 속에 구겨 넣는 일이 아니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 상호 간의 신뢰에 기반 한 소통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교육적 행위의 전제인 '상호 존중'과 '신뢰' '소통'을 위해서는 학생인권조례에서 담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도가 높을수록 교육적 효과는 높아진다.
마치 학생인권이 신장되면 교권이 그만큼 약화될 것이라는 잘못된 관점에서 학생인권조례 반대를 정당화하는 의견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권을 존중받는 아이들이 교권을 인정할 확률이 더 높다. 역으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교권을 부정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교육이라는 활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교권과 학생인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적인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의 충분한 대화가 이뤄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일수록 부모의 의견을 따르고 존중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교육이라는 활동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같다.
- 교권의 실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현장 교사들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고민하는 것은 교육청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란이 첨예한 지금 시점에 굳이 '교권 조례' 카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조례'에 대한 사회적 반대 여론에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교권 실추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다 근본적으로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교권의 실추가 현실적인 문제임은 자명하지만,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는 시점에서 동시에 교원조례가 거론됨으로써 마치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적인 것인양 오해될 소지가 없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
그러면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교육이 어려워지게 된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사실 체벌금지 조치가 내려졌을 때 많은 교사들의 심리적 반발이 강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이지만 교사 중에는 아직도 체벌이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대부분의 교사들이 체벌에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현실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체벌을 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왜 그런 심리적 저항감을 느꼈을까?
나는 체벌금지 조치에 대해 교사들이 느끼는 심리적 저항은 사실 저항이라기보다는 '좌절감'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교 현장에서 부딪치는 학생지도의 어려움은 날로 커지고, 그 해결책은 잘 찾아지지 않는데 체벌금지 조치는 마치 그 원인과 책임이 교사들에게 있는 듯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교사들은 잠재적인 무기를 박탈당했다는 생각보다는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원리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조례의 시행에 대해 교권실추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특히 교사들의 심리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교권의 실추는 현상적으로는 교사의 지도에 불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교권의 실추는 권위적인 교육청과 교장들의 학교 운영에 의해 교사들의 발언권이 묵살당하는 현실과 헌법에서 보장한 정치적 기본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교사의 처지에서 오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부담의 늪에 던져지고 있다. 입시라는 목표를 향해 12년 동안 보이지 않는 채찍이 아이들에게 휘둘려지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부의 즐거움을 느껴 볼 기회도 박탈당한 채 성적과 경쟁의 압박에 눌려 살아가고 있다.
교사들 역시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우리의 학교가 과연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인지, 학교가 교사들에게 가르침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인지 물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점수를 무기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교사로서 지금은 가장 효과적인 학생 통제 방법이다.
학교 현실이 이러한데 과연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가능할까? 교사들은 이런 어려운 여건임에도 성인이고 교육자라는 책무감에서 매 순간 스스로를 다스리며 버티고 있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은 그런 책무감이나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것을 친구를 괴롭히거나 교사에게 반항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자살과 같은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되기 이전에 이미 아이들은 교사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자신의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책의 하나로 삼아왔다. 이것이 내가 분석하는 학생들의 교권 침해 현상의 원인이다.
결국, 가장 일반론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오늘날 학교에서 교사의 지도에 불응하거나 반항하는 학생들이 없어지게 하려면 아이들에게 학교가 배우는 일이 즐거운 곳이 되도록 바뀌어야 한다.
또한 학교 운영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교사가 아이들을 인격적 주체로 온전히 인정해 주는 여유를 갖기 힘들다. 따라서 아이들이 교사의 권위를 진심으로 인정해 주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학교 운영과 교육의 실질적인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교사들이 온갖 교육 외적인 행정 잡무들에서 해방돼 오로지 아이들 교육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런 방책 없이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이해하고 참아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헌신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와 상담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런 여건 하에서 교사와 학생 간에 더 많은 소통이 이뤄진다면 교권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은 현저히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 중에서도 도덕성이나 인간관계의 매너 면에서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 중에서도 이런 문제를 가지는 경우가 생겨 날 수 있다. 특히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협력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특징이 나타날 빈도가 더 크다. 이 경우에는 철저하게 교육적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머리와 복장 규정을 지킬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요구할 교권 존중 역시 이러한 타인에 대한 존중의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다. 이점에서 볼 때 폭력 등의 방식으로 다른 친구를 괴롭히는 행위에 대해 징계를 하듯이 교사의 지도를 거부하고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 불손한 행동에 대해서도 징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혁신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노력해 왔다. 지난 1년 간 혁신학교를 경험하면서 비록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이긴 하지만 아이들과 교사 간의 신뢰와 소통이 회복되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인권조례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교권의 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진정으로 존중받는 아이들이 교사도 친구도 존중할 줄 알게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한 강민정 기자는 북서울중학교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