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화요일마다 순회진료를 나간다. 내가 사는 이 곳 남양면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동강면에는 보건지소에 한방실이 없다. 요철이 맞물리듯 한방실이 있는 지소에서 없는 곳을 메꾼다.
의원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큰 면이다. 번화가 목 좋은 곳 2층에 한의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평소 사람들로 붐볐다고 하니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자리을 옮긴건 아닌가보다. 덕분에 몇 달 동안 감질났던 어르신들이 봇물처럼 진료실로 들어온다.
하루에 4,50명을 진료하던 나로도 보건지소의 광경이 재현됐다. 아침부터 대기실의 모든 의자가 마을 사람들의 엉덩이를 받쳐주고 있다. 침상이 세 개 뿐이라 소화하기가 힘들다.
"류옥근 아버님, 강담심 어머님, 류중택 아버님 들어오세요." 앉아있던 세 명이 일어나면, 서 있던 세 명이 앉는다.
기다림은 환자나 의사에게 모두 고역이다. 대기가 길어질 요량이면 접수를 받으면 아니 된다. 오전에 온 사람은 오전에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 낮 12시부터 1시까지의 점심시간이 마지노선처럼 압박을 가해온다. 세 분씩 여섯번. 아침 시간에 18명의 남녀노소를 진료하였다.
일찍 와도 2,3 시간 기다렸다 치료받느니 오후 한가할 때 오면 좋을 것이다. 볼 일은 모두 아침에 끝내야 한다는 대 원칙에 충실한 시골 어르신들. 볼 일을 마친 어르신들은 후련한 얼굴로 길을 나선다.
점심을 먹고 나니 해가 중천을 지나 늘어진다. 몸도 시간도 늘어진다. 뒷사람 때문에 깍쟁이처럼 굴던 15분의 유침시간(침을 꽂아놓는 시간)도 에누리가 많다. 타이머가 울어도 조금 더 놔둔다. 말이 한마디라도 더 간다.
좌골 신경통이 도져서 침을 맞으러 오신 장영수 아버님. 으레 묻는 '언제부터 그러세요?'. 때는 여순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7년생인 연세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여순 사건이 진압된 후 검문검색이 엄중하던 당시. 밤에 잠깐 밖에 나갔던 것이 야간검문에 걸릴 줄이야. 눈에 띄는 게 죄가 되는 세상. 엉덩이를 각목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데 20대 후반의 왕성한 체력도 배길 수 없었다.
다행히 관리를 잘해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정월 초부터 반갑지 않은 손님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60여 년의 세월이 기억을 무디게 한 탓인지 어르신은 소설가 김훈의 절제된 어조로 말을 뱉었다. 감춤으로써 감정은 드러났다. 김수영 시인의 '눈'에서처럼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고 싶은 심정.
이달막 어머님은 여기저기가 아파서 왔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왼쪽 눈도 성치않다. "원장님. 나 잠 잘 봐줘. 혼자 산께 아프면 질로 탈이여"라며 말문을 연다.
'달막, 달막이라.'
나로도에서 만났던 홍달금 어머니가 떠올랐다. 당신을 끝으로 딸이 안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딸을 금지한다는 뜻의 '달금'이 되었다. 혹시 이 분도 그런 사연이 있는가?
1남 6녀 중 맏딸이다. 딸 하나만 낳아 잘 기르려다 줄줄이 다섯을 더 낳았다. 순천 낙안 오금재 너머 마을에서 태어났다가 갓 20대 넘어 동강면으로 이사 온 이래 지금까지 쭉 붙박이다. 동갑내기 남편은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한 여름에 풀을 베다가 풀독이 올라서 여수에서 약을 사다 먹었는데 피가 막혔다. 한의학적으로 어혈(瘀血)이 기혈의 운행을 막아버린 것이다. 병원에 가서 수술도 받았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생만 하셨다.
"그래도 오래 살고 싶은가 조금씩 자주 먹데. 일어날려 해도 힘이 없어 주저 앉고 주저 앉고. 근데 사람이 떠날라면 자리뜸을 하더구만. 돌아가기 며칠 전에 토방(土房, 마당과 마루 사이에 위치하며, 마당 보다 약간 높게 되어있는 부분. 신발을 놓는다)에 내려가서 죽는다고 발광을 하데. 티비도 이짝 저짝 옮겨다 놓고." 몇 달간 병수발을 했을 때가 떠오른 모양이다. 식사는 잘 하시냐 묻자 "지금 혼자 산께 밥 하기도 싫어"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한 번 지어서 사흘 나흘 두고 먹는데다가 반찬 만들기도 귀찮아졌단다. 그나마 점심때 친구들이 오면 같이 먹는다니까 다행이다.
얘기를 나누는데 타이머가 울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있다 침을 뺐다. 옷을 주섬 주섬 입으며 89세의 이달막 어머님이 묻는다. "또 언제 오까? 목요일?" 주마등처럼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르신은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이렇게 또 진료실의 하루가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