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러진 화살>의 리얼리티 논란영화 <부러진 화살>이 화제다. 처음에는 그 유명한 '석궁사건'을, 돌아온 거장 정지영 감독이 '노 개런티'를 약속한 배우 안성기 등과 함께 5억 원의 저예산으로 연출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그러더니 영화가 SNS의 폭발적인 지원에 힘입어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자, 이제는 영화의 소재가 됐던 '석궁사건' 자체와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 등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 내용의 리얼리티'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분명 허구의 창작물이라는 전제에도, 영화의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진실 공방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의 90%가 진실"이라고 이야기 함으로써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에 대법원은 이에 맞서 영화가 "흥행을 염두에 둔 예술적 허구에 불과하다"며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도대체 왜 다른 영화와 달리 <부러진 화살>의 리얼리티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일까. 사람들은 영화가 허구라는 것을 잊은 것일까.
지난해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냈던 영화 <도가니>를 떠올려보자. 영화 <도가니>에는 <부러진 화살>과 같은 엄격한 리얼리티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았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기에 그 어느 영화보다도 충격적이고 섬뜩했던 영화 <도가니>였지만, 사람들은 그 영화의 세세한 부분의 리얼리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비록 작은 허구가 섞였더라도 <도가니>에 등장하는 교장과 선생님들은 어차피 사회적으로 공인된 '나쁜 놈'이었으며, 따라서 쉽사리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쁜 놈'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반면, <부러진 화살>을 보자. 영화 <도가니>와 달리 <부러진 화살>의 '나쁜 놈'은 녹록지 않은 상대, 즉 우리 사회 최고 권력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 사법부다. 따라서 이 영화에 있어서 리얼리티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명확한 '실체적 진실'이 아니고서는 '나쁜 놈'에 대한 정의와 응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화가 지적하는 '나쁜 놈' 사법부는 오히려 '실체적 진실'의 진위를 가리는 권위를 부여 받은 무소불위의 존재다. 조금이라도 어설픈 리얼리티의 잣대가 적용됐다가는 영화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영화 <부러진 화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리얼리티이다. 허구의 창작물인 영화에다 리얼리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인 일이지만, 어쨌든 <부러진 화살>은 그 내용의 특성상 리얼리티를 담지해야 한다. 그것이 <부러진 화살>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책임이다.
<부러진 화살>를 통해 보고자 하는 리얼리티리얼리티 논란에 휩싸인 영화 <부러진 화살>. 그렇다면 영화가 주장하는 리얼리티에 작은 허구가 섞였다면 영화는 그것만으로 가치를 잃어버리는 걸까?
사법부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영화 <부러진 화살>은 영화가 주장하는 사실에 작은 허점이 있더라도, 그 사회적 가치는 끊임없이 회자될 것이다. 비록 <부러진 화살>의 핵심은 리얼리티에 있지만, 영화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영화를 관람하는 수용자들의 태도다. 이에 관련해 영화는 그 내용과 별도로 사회적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부러진 화살>을 봤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인 것이다.
한물 간 감독과 오래된 배우, 딱딱한 소재와 쉽게 꺼낼 수 없는 주제 등 흥행하기 어려운 온갖 조건에도 흥행하는 영화. 도대체 사람들은 왜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는 것일까?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석궁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아니면 영화가 재미있어서?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꿰뚫고 있는 '시대정신' 때문이다. 막대한 자본과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1%가 법치주의를 운운하며 99%를 합법적으로 지배하는 시대의 불합리성. 관객들은 그것을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을 사로잡는 것은 재미와 감동이 아니라 분노다. '재판이 아닌 개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분노.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우리의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자 한다. 사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억울한 사람들을 가두고 처벌하는, 시대적인 결단을 내리기 보다는 기득권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에만 전전긍긍하는 비참한 현실을 되새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관객들에게 <부러진 화살>의 작은 허구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썩어빠진 우리 사회의 일면이며, 그 사실을 나와 함께 목도하고 분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안도감, 그래서 이와 같은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는 자신감. 영화 <부러진 화살>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부러진 화살>과 <나는 꼼수다>영화 <부러진 화살>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잘못된 현실'에 분노하는 이가 나만이 아니라는 자각.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레퍼토리 아니던가? 그렇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건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 <나는 꼼수다>(<나꼼수>)였다. 골방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그 존재를 모르고서는 사람들과 대화하기조차 힘든 경지가 돼버린 해적방송 <나꼼수>. 그들도 매번 이야기하지 않는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 제발 "쫄지마, 씨바."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의 공통점은 둘 다 견고한 기득권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함으로써 작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각기 소설과 영화로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허구일 수도 있음을 자인하지만, 두 매체를 접한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수용하고 현실에 적용시킨다.
두 존재 모두 리얼리티 부분에 있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청취자가 혹은 관객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를 통해 공고하던 기득권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는 정치와 썩어빠진 현실에 무관심하던 이들을 공론의 장으로 호명해 냄으로써 기득권 사회에 균열을 가져온 것이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두 존재에 대해 이 시대 최고의 논객 진중권이 모두 '추상과 같은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진중권은 소위 범 진보 진영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비논리적인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오히려 보수언론들에게 <부러진 화살>과 <나는 꼼수다>에 대한 비판의 모범사례로 등극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두 존재 모두 100% 완벽한 리얼리티를 담보로 하지 않고 있는 소설을 표방한 방송과 영화이기 때문이며, 전체주의를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진중권의 입장으로서는 그 두 작품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의 존재가 위험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중권을 가리켜 진보의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다. 그는 논객으로서 엄중한 논리의 잣대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며, 우리는 단지 그가 지적하는 위험성은 인정한 채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를 수용하고 응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부러진 화살>과 <나꼼수>를 이야기함에 있어 그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두 매체를 많은 이들이 함께 수용한다는 사실 자체이며 그만큼 사회 변화의 가능성이 커졌다는 사실이지 않은가.
끝으로 이 영화를 처음 보러 들어간 날, "이 영화 내용이 뭐냐"고 묻는 아내에게 한 마디로 영화의 성격을 규정했던 어떤 아저씨의 일갈로써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국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영화 대박 나야 해. 사회정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