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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표지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표지 ⓒ 인물과사상사
나는 드라마를 그리 즐겨 보지 않는다. 드라마보다 다큐멘터리를 선호한다. 어느 것을 보느냐는 물론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내가 드라마와 멀어지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니 대략 이렇다. 수도꼭지처럼 틀면 나오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이번에는' 하고 기대했던 마음을 '역시나'로 돌아서게 하는 지겹고 뻔한 스토리,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억지스럽게 진행되는 질 낮은 시나리오와 연출력 등.

아무리 허구라고는 하지만 극의 진실성과 개성을 상실해가는 지금의 드라마는 내 호기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난 가뭄에 콩 나듯 드라마를 보는 편이기에 'OO폐인'이나 'OO앓이'와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가며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대중들에게 조금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는 나처럼 드라마 기피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드라마를 새롭게 보게 해준다. 시대별로 정리해 드라마를 관통하는 한국사를 쉽고 빠르게 훑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것.

드라마, 그 씁쓸한 독재의 어릿광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드라마는 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 라디오 드라마였다고 한다. 일제는 이 드라마가 자신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길 바랐다. 해방 후 미군정 역시 라디오를 공보 매체로 활용했다. 이후에 출현한 독재권력 역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드라마를 활용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 드라마 제작에 열을 올렸으며, 국민 계도와 계몽 기능을 확장한다는 미명 아래 제작 지침을 하달한다.

권력은 언제나 언론뿐만 아니라 모든 매체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수단으로 이용하였다. 탤런트 박용식이 단지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TV 출연을 금지당한 것만 보더라도 매체에 대한 권력의 장악력을 가늠하고도 남을 지경이다. 낙하산 사장이 만들어낸 방송사 구성원의 과잉 충성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드라마를 제작했다는 것.

드라마 제작에 대한 독재정권의 간섭과 통제가 이 정도였다면 뉴스와 같은 언론 매체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할까. 드라마에 제작지침이 있었다면 언론에는 보도지침이 있었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자들이 비단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하며 방송이라는 매체를 거느리고 장악해 나갔던 것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또 얼마나 달라졌다고 확신하는가. 언론에 대한 장악과 탄압과는 달리 드라마라는 장르에 대한 그들의 저의는 훨씬 더 교묘하게 '~ing(현재진행형)' 되는 중일지도 모른다.

불편한 진실, '막장 드라마'가 뜨는 이유

 2010~2011년 방영돼 '현빈앓이' 현상을 불러일으킨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포스터
2010~2011년 방영돼 '현빈앓이' 현상을 불러일으킨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포스터 ⓒ SBS

대중은 미심쩍은 드라마의 출발과 교묘하게 감춰진 저의와는 상관없이 고달픈 현실과 피곤한 일상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가장 편리한 피로회복제로 드라마를 찾았다. 대중음악 시장에서 발라드와 댄스가 주를 이루듯 드라마 시장에서는 멜로드라마와 불륜드라마와 같은 통속극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기에 이르렀다.

자극적인 소재에서 희열을 느끼는 소비자들은 훨씬 더 강도가 센 것을 찾았다. 그리고 출현한 것이 바로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끈 주역인 '막장 드라마'다.

이 책에서는 막장 드라마가 유행하는 배경에 대한 분석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들을 소개한다. MBC 이홍우 PD는 "톱스타가 없는 불리한 캐스팅으로 6개월 이상 극을 끌어가려면 자극적 방법론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또 <한겨레> 2009년 1월 9일자 기사는 "말초적 자극을 선호하고 그에 기댄 문화자본은 쉬운 돈벌이를 찾는다. 혁신적 사고는 멈추고, 비슷한 관습이 되풀이되며, 문화적 활력은 질식된다. 이른바 '문화의 퇴행'이다"라고 막장 드라마 현상을 분석했다.

한편, <경향신문> 유인경 기자는 "전문가들은 최근의 경제 불황과 답답한 사회 풍토가 막장 드라마의 인기에 한몫한다고 주장한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반 토막 난 펀드, 불안한 직장, 한심한 정부, 매일 터지는 각종 흉악한 사건 등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기보다는 황당할지라도 잠시 암담하고 고단한 현실을 잊게 만들며 자꾸 다음 회가 기다려지게 만드는 강한 중독성에 나름대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주는 막장 드라마를 통해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8~2009년 방영된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 포스터
2008~2009년 방영된 SBS 드라마 <아내의 유혹> 포스터 ⓒ SBS
<아내의 유혹>. 이 드라마는 드라마 기피증을 앓고 있는 나에게도 본방을 사수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오랫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여 주인공이 복수의 대상에게 보내는 처절한 복수의 과정은 그동안 보아왔던 복수의 스토리와는 그 전개 양상이 판이했다. 혼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물론이고, 숨 돌릴 틈 없이 스피드하게 전개되는 극단적인 전개는, 내가 살아오면서 받았던 유·무형의 수모들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리는 쾌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복수, 그 후에 남은 것은 여타의 드라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존과 다른 시도와 스피드에 매혹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오면서 느낀 것은 역시 '허망함'뿐이었다. 이후 제작된 막장 드라마에 대해서 다시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흥행작을 넘어서지 못하고 어설프게 따라잡으려다 가랑이 찢어진 그야말로 '막장'인 완성도 때문이었다.

시청률 기록 갱신이라는 찬사에도 '막장 드라마'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인 것은 중독성 있는 단기적 쾌락이, 우리 삶을 다시 음미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울림과 감동에는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소재나 표현의 방식에서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한 채 우려먹기에만 급급한 막장 드라마라면 단물 빠진 껌을 씹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휘발성은 강한 대신 긴 여운과 되새김질은 약화되어가는 우리 드라마의 현실이 안타깝다.

자본의 손아귀, 광고 없이는 드라마도 없다? 

날이 갈수록 드라마 제작은 급속도로 스폰서에 의존하고 있다. 광고 유치에 목을 맬 수밖에 없던 상업방송의 본질적인 한계로 인해 스폰서의 횡포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작비의 80퍼센트가 주요 연기자들의 출연료로 지출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쯤은 쉽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어떠할까? 시청률 추이 살피랴, 제작자 눈치 보랴, 시청자 의견 수렴하랴, 쪽대본과 초치기 관행이 굳어지면서 4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촬영을 하는 등 연기자와 스태프를 혹사시키는 비인간적인 제작환경은 개선되기 쉽지 않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누가 끊을 것인가. 광고주의 입맛에 의해 움직이는 이러한 드라마 제작의 폐단은 결국 자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막장 드라마를 양산해낼 가능성만을 높여 놓았다.

2007년 MBC <베스트극장> 폐지에 이어 2008년 KBS <드라마시티> 폐지는 공중파에서 단막극의 퇴출로 이어졌다. 스타 집착증에 빠진 기존 드라마 제작의 타성을 깨고, 연출가의 실험정신을 펼쳐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신인 배우와 신인 작가 발굴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단막극의 작고도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기능이었다.

단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퇴출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참신하고 다양한 작품을 만나기를 바랐던 마니아와 소수자들을 위해서라도 공영방송이 이를 도리어 보전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최근 한 방송사에서 단막극 부활이 시도 되고 있어 반갑다. 날로 양극화되어가는 전파에도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은 방송사가 지녀야 할 미덕이다. 이 미덕은 양질의 드라마를 창작될 수 있는 건강한 토대를 만들어 보다 성숙한 문화를 이끄는 초석이 될 것이라 믿는다.

 1991~2007년 방영된 MBC <베스트극장>. 사진은 2005년 방영된 '태릉선수촌'의 출연진들.
1991~2007년 방영된 MBC <베스트극장>. 사진은 2005년 방영된 '태릉선수촌'의 출연진들. ⓒ MBC

한국의 드라마, 그 찬란한 빛과 그림자

일각의 연기자들은 대본을 받고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충분하지 않은 채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고 한다. 연기자마저 납득할 수 없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이 그 이유를 파고들자면 작가들 역시 말하지 못할 고충을 안고 있을 것이다. 사전제작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우리의 드라마 제작 현실도 작가의 자율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시나리오의 힘이 아닐까. 저자는 거액의 출연료를 지급하고 스타들을 기용한 드라마들의 성공률이 점차 불확실해지면서 시청률이 검증된 작가들을 붙잡으려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제는 기본에 더 충실한 드라마들이 안방극장을 찾아갔으면 한다. 그리고 그 기본을 알아보는 시청자들의 발언이 힘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처럼 드라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시청자들의 눈이 조금씩 드라마로 향할 수 있도록 말이다.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는 한국 드라마에 비쳐진 한국 사회의 병폐들을 진단하고 분석해보는 데 있어 아주 쉽고 편리한 참고서가 되어줄 것이다. 드라마와 관련해 빚어진 해프닝과 사건·사고들이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 큰 부담 없이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일반론적인 한국사에 머무른 밋밋함이 단점이고, 드라마와 관련한 지적 호기심(어쩌면 허영심?)을 채워주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비판이나 논란의 대상으로서 평가되는 드라마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좋은 드라마의 모델로 삼을 만하거나 조명해볼 만한 작품 소개가 함께 곁들여졌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졸견을 덧붙인다.

덧붙이는 글 |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김환표 씀,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2년 1월, 448쪽, 1만7000원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김환표 지음, 인물과사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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