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경남 통영에서 한 40대 의사가 수면 내시경을 받으러 온 여성 환자들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수면내시경을 끝내고 간호사를 내시경검사실에서 모두 내보낸 뒤, 환자들을 전신마취하고 성폭행한 것이다. 그는 20~30대 젊은 여성환자 3명을 성폭행했고, 결국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현재 복역 중이다.하지만 의사 면허까지 박탈되진 않았다. 때문에 출소 후 그가 그의 이력을 모르는 다른 지역에서 개업, 또는 취업을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 최근까지 의사는 의료행위 중 여성 환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의료 업무에 계속 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성범죄를 일으킨 의료인은 이후 10년간 의사 면허가 제한될 전망이다. 의사의 성범죄율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성범죄 전력자 취업제한 대상 직종에 의료인, 학습지 교사 등이 포함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의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30일 국회를 통과해 올 하반기부터 시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진료를 성추행이라 주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문제는 개정법률에 대한 후폭풍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1월 5일 개정법률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전국의사총연합회(이하 전의총)는 법률안을 대통령이 거부해줄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와 함께 의료인 6305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제출했다.
법률을 대표 발의했던 민주통합당 최영희 의원실엔 이 법안에 반대하는 항의 전화가 지금도 매일 수십 통씩 걸려온다고 한다. 최 의원 측은 1월 26일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십여 명의 의사들이 단체로 항의 방문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1월 25일 방송된, <청년의사>의 팟캐스트 방송 '히포구라테스'에 따르면 의협에선 이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까지 언급했었다고 한다. 이에 한국환자단체연합회도 대응 성명서를 발표, 대국민 서명 운동을 준비하는 등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이 더욱 더 심화되고 있다.
전의총의 노환규 대표는 1월 26일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진료의 특성상 신체접촉은 불가피하다. 하다못해 청진이라도 신체접촉은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채 환자가 성추행이라 주장할 수 있다"며 이번 개정안으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환자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수용돼 해당 의사가 30만 원 정도의 가벼운 벌금형만 받는다 해도 10년이란 기간 동안 의사 면허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전의총이 발표한 성명서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한다. 벌금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인해 10년간 경제적 사망선고를 받을 수 있을 경우 의사의 진료행위를 성추행이라 주장하며 의사를 협박하는 이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전의총 쪽의 주장이다.
이뿐만 아니라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에 성인대상의 성범죄가 포함된 것 역시 법이 졸속으로 만들어진 증거라고 주장한다. 해당 성명서는 의료인으로서 이 개정법률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추행으로 몰고가 협박? 유죄 입증 자체가 어려워"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의사의 진료행위를 성추행이라 주장하며 의사를 협박하는 이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현실을 무시했다는 것.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은 1월 26일 기자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형사재판에서 성범죄를 입증하는 것 자체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행정법 상 진료실 내 CCTV 설치가 금지돼 있어 성범죄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진료실에 간호사가 따라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목격자를 찾기도 힘들다. 의사 성범죄 사건의 경우 아예 간호사들을 모두 병원 밖으로 내보내거나 일찍 퇴근시킨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확실한 물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형사재판에서 진료실 내 성범죄에 유죄 선고가 내려지기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실제로 대검찰청 범죄연감에 따르면 의사들이 최근 5년간 저지른 성범죄(강간)는 총 259건이다. 의사들이 저지르는 범죄 중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료실 내 성범죄가 유죄 입증이 어렵고 2차 가해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실제 사건 발생 건수는 유죄 확정 사건 건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추행을 당한 환자는 진료 전에 병원에 적어 낸 자신의 개인정보 때문에 신고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대부분 피해자들은 자신의 연락처나 주소가 가해자인 의사에게 전해져 2차, 3차의 폭력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의사만 빼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 특권 요구하는 것"이외에도 유죄 확정시에만 적용되는 법인 데다가 다른 직업과 달리 의사만 예외로 둬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은 어디까지나 성범죄가 성립됐을 때 취해지는 2차적 제한규정이다. 형사재판에서 성범죄가 확정됐을 경우에만 10년간 취업 금지라는 제재가 뒤따른다.
또 성범죄자 취업 제한은 의사에게만 '편파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방문 학습지 교사도 이번 개정안 대상에 포함됐으며, 이미 학교 교사, 보육원 교사 등에겐 성범죄 유죄 선고 이후 취업 제한이 적용되고 있다. 택시기사의 경우엔 취업 제한 기간이 20년에 달한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월 1일 성명서를 발표해 "성범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의료인의 의사면허를 영구 박탈하는 것도 아니고 10년간만 제한하는 법률에 대해서 의사 5000명의 서명을 받아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탄원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유치하다"며 "환자들을 '진료'와 '성추행'도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로밖에 인식하는 못하는 전의총에 대해서 환자입장에서 심히 불쾌하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백진영 공동대표는 "일반인에 비해 고도의 윤리성이 요구되는 의료인이지만 성범죄 처벌에 있어서 특권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주현아 기자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