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이 즉위 17년을 보내고 있던 595년,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만노군
(萬弩郡) 태수로 있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은 '만노군은 지금의 진주(鎭州)'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부식의 표현방식을 빌자면 '진주는 지금의 진천'이다. 고려 때 진주라는 이름을 지녔던 만노군이 진천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태종 13년(1413)의 일이다.
만노군은 백제와의 접경지였다. 김서현이 국경 지대인 이곳에서 태수로 근무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 무력(武力)의 전공(戰功)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10대손이자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의 셋째아들인 무력은 진흥왕 15년(554)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관산성(管山城) 일대에서 대가야와 왜군까지 가세한 백제 대군과 일대 혈전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무력은 백제의 장관급 고위관리인 좌평 4명을 비롯 장졸 2만9천6백여 명을 죽였고, 심지어 성왕의 목까지 베는 업적을 쌓았다. '(백제의)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의 완벽한 대승이었다.
무력은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해인 553년에 신주(新州)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다. 신주는 말 그대로 새로[新] 닦은 주(州)이니,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그해(553년)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읍(邊邑)을 빼앗아 설치한' 신라의 새로운 땅이었다. 신주는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하는 한강 남쪽 일대였으므로 중국과 오가는 국가적 최요지였고, 장차 삼한일통의 기반이 된 삼국 사이의 치열한 쟁탈지였다. 진흥왕이 그토록 중요한 지역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금관가야의 왕자 출신인 무력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그가 출중한 능력을 발휘한 덕분이었을 터이다.
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왜 만노군으로 갔을까?그렇다면 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어째서 만노군으로 갔을까? 본래 그는 서울(경주)에 있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서현과 (왕의 동생 등에게 주어지는 자리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 길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되어 중매도 거치지 않고 부부 관계를 맺었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어 만명과 함께 가려고 하니 그제서야 숙흘종이 딸과 서현이 야합했음을 알게 되었다. 숙흘종은 딸을 미워하여 딴 집에 가두어놓았다. 하지만 갑자기 벼락이 문을 때리는 바람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잃었고, 만명은 부서진 구멍으로 빠져나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가버렸다.'
무력은 뒷날 각간(角干)까지 오른다. 각간이라면 신라에서 가장 높은 벼슬이다. 신라가 한때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자리를 만들지만, 김유신 개인을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일 뿐이다. 이는 <삼국유사>의 다음 대목이 잘 말해준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나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는 김유신이 태대각간이 된 것과 같다.' 망국(亡國)의 왕자 무력이 각간에 오른 것은 엄청난 출세였다는 말이다.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게 된 때에 아마도 그의 아버지 무력은 중앙정부 고관으로 있었을 법하다. 예로부터 아버지가 지방의 세력가로 있으면 그 아들은 서울에 두고, 중앙 관직에 있으면 지방의 장수로 내보내는 것이 역사의 관례인 까닭이다. 그렇게 하면 반역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조치가 된다.
김유신은 대략 열다섯 살까지 만노군에서 살게 된다. 이는 서현이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15년 이상의 긴 세월을 줄곧 만노군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가야에서 넘어온 무력 일가는 나라를 바치고 큰 전공까지 세웠지만 아무래도 '신김씨(新金氏)'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라의 주류(主流) 왕족인 김씨들은 금관가야 출신인 무력계 신김씨들을 상당히 견제했을 듯하다. 무력 본인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데다 가야계 출신들을 다독여야 할 필요도 컸기 때문에 그를 각간의 자리에까지 앉히기는 했지만, 임금 자리마저 그들에게 내놓는 불상사는 사전에 차단해야 마땅한 것이다. 뒷날의 역사에도 그런 사례는 얼마나 많은가. 궁예를 섬기던 왕건이 옥좌를 빼앗고, 고려의 신하인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그런데 김유신이 열다섯 살 안팎까지 시골에서 거주한 것은 본인이나 그 부모의 뜻한 바가 결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화랑은 다수의 낭도를 거느렸는데, 이 낭도들의 대부분이 시골 출신이었다. 특히 군대의 병사들은 거의 전부 농어촌에서 태어나고 사는 청년들이었다.
그러므로 평생을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보내는 김유신으로서는 어린 시절을 줄곧 시골에서 보낸 생생한 체험이 그들을 지휘하는 데에 둘도 없는 자산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관대작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호화찬란한 생활을 누리며 살아온 다른 장수들과, 시골의 야산에서 농민의 자식들과 함께 산과 들판을 땀깨나 흘리면서 뛰어놀고 성장한 김유신 중 누가 병사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훌륭한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인가.
김유신이 태어나고, 살고, 뛰어놀던 곳충청북도 진천에 가면 김유신이 태어나고, 살고, 뛰어놀았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생가터가 있는 진천군 진천읍 계양마을 태령산 일대에 치마대(馳馬臺)라는 이름이 전해져 오는 것도 그것의 한 사례이다. 치(馳)는 글자 속에 '말[馬]'이 들어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달릴 치'이다. 말을 달리며 놀던 터[臺]를 뜻하는 '치마대'라는 이름이 남은 것은 이곳이 바로 김유신이 승마 훈련을 하던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생가터에서 태령산 정상쪽으로 오르다가 태실 반대편으로 만뢰산 방향 능선을 타고 나아갈 때, 산줄기 북쪽 아래에 보이는 구수마을도 김유신의 옛일이 깃든 곳이다. 유신은 구수마을 뒤편에 있는 436m 높이의 산에서 군사 훈련을 했는데, 말에게 먹일 죽그릇을 아홉 군데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래서 마을에 '구실'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봉우리는 '장군봉'이 되었다. 구실은 뒷날 한자어로 바뀌면서 구수(九水)로 변했다. 또 장군봉 바로 너머 백제와의 국경이었던 곳에는 지금도 성터가 남아 있어 성대(城垈)마을이라는 이름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구수마을 바로 옆의 개죽마을 또한 김유신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유신은 이곳에서 가죽으로 말안장이며 갑옷 등을 만들었다. 그래서 '가죽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것이 뒷날 한자로 바뀌면서 개죽(介竹)이 되었다.
개죽에서 서쪽으로 가면 줄곧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고, 꼭대기까지 오르면 천안시로 넘어가는 엽돈재에 닿는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홍계남(洪季男)이 수천 명의 의병과 함께 왜군을 크게 무찔렀던 전승지이다. 그 이후 다시는 왜군들이 얼씬도 하지 않아 이곳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냈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홍계남의 공을 기려 그를 수원부사로 임명했다.
홍계남 의병장의 영웅담을 전하는 이 승전 기록은 엽돈재 일대가 교통과 군사의 요지였음을 증언해준다. 당연히 삼국 시대에도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었고, 고개 아래 깊은 마을에는 군사들이 진을 쳤다. 그래서 서술원(西戌院)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西)는 서쪽, 술(戌)은 서북쪽을 나타내는 한자이고, 옛날에 관리나 군사들이 머물고 말을 갈아타는 곳을 원(院)이라 했으니, 신라의 서쪽 변경인 이곳에 서술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술원은 뒷날 소리내기 좋게 서수원으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 '김유신은 서울사람이다(金庾信 王京人也)'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유신이 서울, 즉 경주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는 김유신이 생애 전반에 걸쳐 주로 경주에 살면서 활동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표현이다. 하지만 보통은 '고향'을 중심으로 '어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김유신은 충청도 사람이다.' 더 좁게는 '진천 사람이다.' 그는 진천에서 태어나 태령산 주위에서 열다섯 살 안팎까지 살았다. 그런 점에서, 태령산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구수마을, 개죽마을, 서술원, 성대마을 등 신라와 김유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장을 한번쯤 답사해보는 일은 상당히 의미있는 여행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