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 끝났다. 오랜만에 모였던 가족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골은 빈 들녘처럼 허전 하다. 설 명절의 크고 작은 여러 후유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아쉬움으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마을회관에 모여 지난 설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쏟아낸다.
흑룡해가 밝은지 벌써 보름이 돼 간다. 정월 보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시간이다. 설 명절이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만나 피붙이의 정 을 나누는 시간이었다면 정월 대보름은 사람들이 모여 액을 쫒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의 축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의 아쉬움을 금세 떨쳐내고 정월대보름으로 빠져든다.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큰 행사를 치루고 나면 으레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아쉬운 정을 흥겨운 마을 축제로 승화시킨다. 모든 사람들이 뒤틀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유쾌하게 이끄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이 아닌가!
설이 지나자 마을은 곧 정월 보름 행사 분위기로 빠져든다. 마을회관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보름에 먹을 먹거리와 흥거리를 짜기에 바쁘다. 정월대보름 주요 행사로는 윷놀이도 있지만, 액을 마을에서 쫒아내기 위해 하는 '달집태우기'는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나무를 베어다가 짚과 장작으로 달집을 만든다. 대나무는 귀신을 쫓고 장작은 오래 불을 피우기 위함이다. 이렇게 만든 달집을 마을의 논 가운데에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정월 대보름달이 어둠을 헤집고 서서히 마을로 떠오른다. 사람들은 빙 둘러서서 달집을 태울 준비를 한다. 달빛이 불을 붙인 걸까? 달집은 기다렸다는 듯 금세 타오르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대나무 타는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달집은 무섭게 훨훨 타오른다. 맹렬히 달집 타는 소리에 놀라 액 귀 들이 멀리 달아나고 사람들은 손을 모아 각자의 소원을 빈다. 어떤 이는 하늘에 제를 올리듯 큰 절을 올리기도 한다.
훨훨 태워 액을 내쫓다
달집태우기가 절정에 이를 즈음 마을사람들은 풍장(농악)을 치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은은한 달빛이 그들이 마음속 까지 훤히 비추며 멋진 무대를 연출을 한다. 그들의 몸에서 어떤 고뇌나 걱정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흥과 희열이 있을 뿐이다. 휘엉청 밝은 달빛 아래 펼쳐지는 그 모습은 이미 액귀가 모두 물러가고 마을 사람이 하나가 된 흥겨운 축제의 모습이다. 이보다 더 한 흥이 있을까! 오랫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그들의 끈끈한 정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달집의 기세가 정점에 이른다. 어른들은 걸쭉한 막걸리와 따끈따끈한 돼지고기찌개로 흥을 돋우고, 달빛에 몸을 맡긴 채 신명나게 한판 춤을 춘다. 농악 장단이 그렇게 흥겨울 수 없다. 사람들은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으로 마구 토해낸다. 어깨동무를 하고 달집을 도는 그들은 이미 달빛에 취해 하나가 돼 있다.
아이들은 달빛에 숨어 쥐불을 들고 동심에 빠져든다. 태운 달집에 남아 있는 불씨를 가져다 깡통에 넣고 빙빙 돌린다. 검은 연기를 내뿜던 깡통은 어느새 불붙는 바람 소리와 함께 쥐불이 살아난다.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논둑길을 뛰어다니며 쥐불을 힘차게 돌리고 있다. 눈치를 보며 마을길을 서성이던 매서운 추위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다. 아이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그들을 멀리 쫓아내고 대신 도깨비 같은 쥐불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달빛을 희롱하고 있다.
새봄의 일터로 나가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
매년 정월 보름에 펼쳐지는 대보름 행사. 왜 이렇게 추운 계절에 열게 됐을까. 설의 아쉬운 심사를 달래기 위함일까? 아니면 농한기의 여유로움인가? 오랜 겨울 속에 잠자던 마음에 흥을 깨워 새봄의 일터로 나가기 위한 일종의 우리 조상들의 지혜인지 모른다. 아니, 마을의 안녕은 물론 흥으로 게을러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 삶의 에너지를 끌어내기 위한 건강한 마을 축제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정월 대보름 행사는 우리가 지혜를 모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보물 같은 민속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농촌은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빈집은 자꾸 늘어만 가고 노인들만이 사는 실버타운이 돼 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농촌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잊혀져가는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예전처럼 시골마을이 떠들썩하지 않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어 보인다.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정월보름을 맞아 시골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장작불이 따뜻하게 짚인 사랑방에서 정월 대보름의 정겨운 마을축제에 흠뻑 빠져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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