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이 발행한 <의성여행> 홍보책자를 보면 '영니산 봉수대'가 있다. 지도상에는 금성산과 비봉산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봉수대가 있는 곳에 별도로 산이나 봉우리의 이름이 붙어 있지는 않다. 이는 곧 영니산이 금성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로 금성산 정상에 가보면 안내판에 영니산이 금성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니산 봉수대에 가려면 금성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 금성산의 꼭대기에 오르면 정상석 앞 이정표에 영니산 봉수대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비봉산 쪽으로 산길을 약 1km 더 걸으면 옛날에 봉화(烽火)를 올렸던 유적지에 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봉화의 '봉(烽)'은 무슨 뜻일까. 한자사전에서 찾으면 '봉화 烽'이라고 가르쳐준다. '烽火(봉화)'에 쓰인 '烽(봉)'의 뜻을 묻는 사람에게 '봉화 봉'이라고 가르쳐주니 이래서야 사전을 찾은들 아무 의미가 없다.
다른 한자사전을 뒤지니 '烽'의 뜻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兵火'라는 풀이가 나온다. 군사[兵]들이 일으킨 불[火]이라는 뜻이니 대략 이해가 된다. 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멀리 알리기 위해 군사들이 높은 곳에서 불과 연기를 피우는 것을 '봉화'라 하기 때문이다.
영니산은 금성산의 다른 이름금성산 정상에서 비봉산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걷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걷고,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니 불쑥 솟은 봉우리 바로 너머에 봉수대 유적이 나타났다. 바다의 물 위에서부터 높이를 잰다면 해발(海拔) 445m 지점이다.
안내판이 둘 보이는데 그 중 새로 세워진 것을 읽어본다. 이 안내판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본 것과는 달리 한자가 병기(倂記)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래의 글은 (한자를 아는) 독자가 알기 쉽도록 한자와 풀이까지 넣어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본 것이다.
영니산 봉수지(烽燧地)위치 :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산7번지영니산 봉수는 조선시대 제2로(路) 직봉(直烽) 노선(路線)의 내지(內地) 봉수이다. 운영 시기와 축조(築造)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문헌자료를 통해 조선 중기까지 존치(存置)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7월에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봉수의 방호벽(防護壁)은 'ᄀ'자 형태로 잘 남아 있었지만 불을 피우던 거화(擧火) 시설과 봉수군(軍)이 기거하던 주거지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하부(下部) 토층(土層)에서 봉수지와 직접 연결되는 시기보다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推定)되는 기와 등이 확인되었다.우리나라의 문화재 안내판들은 필요하지 않은 한자어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봉수대의 이 안내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안내판은 한자를 잘 모르는 답사자로서는 있으나마나 할 뿐이다. 차라리 그 자리에 없으면 사진을 찍을 때 방해나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될 지경이다.
물론 이는 의성군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의 잘못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해설이 모두 이처럼 한자어 범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나라 안에 빚어지는 것이므로.
문화재 안내판 해설, 문장 좀 가다듬어야안내판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바꾸어서 써본다. 특별한 전문 역사 용어만 아니면 안내판의 설명을 모두 우리말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봉화를 서울로 바로 연결하던 길은 다섯 갈래였다. 영니산(금성산) 봉수대는 그 중 '제2로'에 들었다. '제2로'는 바닷가를 거치지 않고 국토의 안쪽으로만 이어지는 '내지 봉수'의 한 길이었다. 만들어지고, 또 운영된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옛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이곳은 2009년 7월에 발굴 조사를 했다. 적을 막기 위해 쌓았던 담은 'ᄀ'자 형태로 잘 남아 있었지만 불을 피우던 시설과 군사들이 살던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봉수대 터 중 낮은 부분의 흙 속에서는 기와 등이 나왔다. 조선 시대보다 앞선 통일신라∼고려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유물들이었다. 안내판에 나오는 해설처럼, 적을 지키기 위한 축대는 'ᄀ'자 형태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 축대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것 그 자체는 아니다. 2009년에 발굴 조사를 하면서 복원을 한 것이다.
산에 오를 때는 이런 곳을 보아야 한다. 이런 곳을 보면서 산길을 걸으면 더욱 건강해진다. 달랑 등산만 다니면 몸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쉬워 자칫 정신건강을 잃기 쉽지만, 역사유적까지 답사하며 다니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한결같이 맑고 밝고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어른들과 자녀들이 함께 역사유적 답사도 되는 이런 등산을 다니면 국가와 민족의 건강까지 바로세울 수 있을 테니 그 얼마나 좋은가!
조선 시대의 봉수로 |
조선 시대의 봉수로는 크게 다섯 갈래로 이어졌다. 1로는 함경 경흥→ 강원→ 경기→ 양주 아차산 봉수, 2로는 동래 다대포→ 경상→ 충청→ 경기→ 성남 천림산 봉수, 3로는 평안 강계 → 황해→ 경기→ 서울 무악 동봉수, 4로는 평안 의주 → 황해→ 경기→ 서울 무악 서봉수, 5로는 전남 순천 → 충청→ 경기→ 서울 개화산 봉수였다. 이 중 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대비하는 봉수였고, 2로, 5로는 왜의 침입을 경계하는 봉수였다. 봉수는 목멱산(서울 남산)으로 모여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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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에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가 있었다. 직선봉수는 서울로 바로 연결되었고, 간선봉수는 직선봉수에 연결되었다. 봉수는 또 설치된 곳에 따라서도 구분되었다. 남산에 설치한 경(京)봉수, 바닷가나 국경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연변(沿邊)봉수, 그리고 그들을 잇는 내지(內地)봉수였다. 봉수의 대부분은 내지봉수였다. 의성의 영니산 봉수도 물론 내지봉수의 한 곳이었다.
계곡물 너무 맑아 절 이름도 수정사영니산(금성산)봉수대에서 200m 정도 더 앞으로 나아가 오른쪽으로 등산을 하면 금성산성으로 오르면서 바라보았던 노적봉에 닿는다. 노적봉으로 가지 않고 직진하여 2km를 가면 금성산과 비봉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수정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계곡의 물이 너무 맑아 절 이름을 수정사(水淨寺)라 하였다.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지지만 당시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비봉산은 가음면의 것이니 금성면 답사인 오늘의 여정에는 제외를 해야겠다. 주차장에서 금성산 정상, 그리고 봉수대를 거쳐 계속 걸으면 6시간 후 비봉산 정상까지 밟은 기분을 뽐내며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올 수 있지만, 그것은 등산이지 답사가 아니다. 어쨌든 비봉산은 가음면 답사 때나 오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