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4일 치러진 하원 총선에 대한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 시기 러시아 정가는 연말연시 휴가에 들어갔을 테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국가두마 총선에서 정부 여당의 행정력이 동원된 불법 및 선거법 위반 사례 등이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범야권은 제철을 만난 듯 연일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어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시위대 최대 이슈는 총선 결과 무효와 재선거 시행이다. 시위대는 대통령과 총리에게 지난 12·4 하원 선거가 불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였음을 시인하고 민주주의의 적법한 선거법에 따라 재선거를 시행하고, 올해 3월 4일 대통령 선거에도 깨끗한 선거가 시행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야당들은 불공정한 선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총선이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강조하면서도, 만약 불법 및 선거법 위반 사례가 있다면 철저하게 수사하여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도 민주적 절차에 의한 합법적인 시위는 보호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불법적인 시위에는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재천명한 바 있다. 푸틴 총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시위대 구성원들의 정치적 노선, 요구 및 제안 등이 다양하다고 말했다.
시위대, 12·4 총선 불공정하게 치러져 재선거 해야
실제로 시위대는 보수 좌파인 러시아연방공산당 지지자, 자유민주당의 지리놉스키, 친서방 자유주의 진영의 야블로코(Яблоко)와 민족주의자들 등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성향의 집단들이다. 푸틴 총리는 이렇게 다양한 집단들의 주장과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기는 어렵다고 전제하면서 다만 그들이 단일한 요구와 대표성을 가지고 만날 것을 제안해 온다면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수수께끼 같은 러시아 영혼 (Загадочная русская душа)'이라고 하는 걸까? 러시아의 저명한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센터(Левада-центр)는 최근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82%가 12·4 총선에 대해 재선거가 필요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응답자 대다수는 블라디미르 추로프(Владимир Чуров) 중앙선관위 위원장의 사퇴에 찬성하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예산정책에 불만을 토로해 경질된 알렉세이 쿠드린(Алексей Кудрин) 전 재무부 장관도 작년 12월 24일 야당들이 주최한 시위에 합류하여 이번 12·4 총선은 불공정하게 치러졌기 때문에 재선거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중동의 봄, 아프리카의 봄 등 근래 들어서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가 불공정한 선거를 인정하고 재선거를 시행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소련 붕괴 후 독립국가연합(СНГ)에서 전염병처럼 번졌던 그루지야의 장미 혁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키르기스스탄의 레몬 혁명 등과 같이 러시아에서도 '자작나무 혁명'의 쓰나미가 몰아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적다.
유권자들, 수차례 '선택학습' 통해 똑똑해 지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국내·외적 악조건에도 큰 동요 없이 국가의 안녕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위 동참자가 적어서일까? 아니면 총선을 무효화시킬만한 중대한 위법 사례가 없기 때문일까? 민주주의의 발달 덕분에 시민의식이 높아서일까?! 모두 다 맞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러시아 유권자 또는 국민이 지방자치선거, 총선 및 대선 등 수차례의 '선택학습'을 통해 똑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 년의 러시아 역사에서 통치자들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 왔다. 고대 루시, 절대 군주 시대, 로마노프 왕조, 소비에트 연방 등 어느 시대에도 통치자들의 권력이 억제되거나 분리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시대에 권력의 억제나 분리란 시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300년 역사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을 때나 70여 년 역사의 소련이 붕괴했을 때와 같은 권력 이양기에 자유주의(Либерализм), 냉소주의(Циницизм), 멘셰비즘(Меньшевизм), 옐친주의(Ельцынизм), 다원주의(Плюрализм) 등 제3의 길을 찾고자 하는 시대적 노력은 있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권력 이양 과도기인 '새로운 러시아(Новая Россия)' 후에도 완전한 수준은 아니지만 절대 권력 승계 전통은 지속하고 있다. 푸틴은 2000년 3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53%를 득표했고, 2004년 제4대 때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71.3%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 유권자 또는 국민은 전통적으로 통치자들에게 절대적 권력을 주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러시아 통치자들은 국민에게 절대적 권력을 요구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소비에트학(Советология)에서는 광활한 영토의 보위, 다민족 국가 통치와 융합을 위한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의 단결과 러시아화(Русификация) 등을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총선 의미, 과거 전통 깨지기 시작했다
2011년 12월 총선은 통치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주어야 한다는 과거의 전통이 깨지기 시작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러시아 국민은 '국가는 항상 옳고 통치자는 국민들 편이다'라는 절대 군주론적 사고에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통치자의 절대 권력이 국민 자유의 억압과 국가형 부패를 낳는다는 것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선진정치 민주국가 유권자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행정부 수반을', '냉철한 이성으로 민의의 대변자를' 선택하여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러시아는 이번 총선을 통해 입법부와 행정부의 균형 있는 권력구도를 선택하려는 국민적 지혜를 스스로 터득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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