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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죽녹원 입구
담양 죽녹원 입구 ⓒ 이승철

"드디어 대나무 동산, 죽녹원에 가는 건가?"
"그럼 담양하면 아무래도 대나무지, 죽녹원을 안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죽녹원으로 가는 길에 반대하는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멋진 고목들이 늘어서 있는 관방제림이 있는 관방천을 건너자 바로 죽녹원이다. 오르막을 약간 오르자 홍살문 모양의 입구가 나타난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선 1인당 2천 원씩의 입장료를 받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대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크기도 굵기도 서로 달랐지만 청청하게 푸른 잎은 모두 똑같다. 굵은 대나무는 성인의 두 손 안에 가득 찰 만큼 굵은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서있는 대나무들 중에는 겉면에 날카로운 물체로 긁어 쓴 낙서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에스자로 구부러진 대나무
에스자로 구부러진 대나무 ⓒ 이승철

"저쪽에 있는 저 큰 대나무는 몇 년 동안 자랐을 것 같아? 그리고 이 쪽 작은 대나무는?"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 일행이 다른 일행에게 슬쩍 던진 질문이다.

"대나무는 빨리 자란다던데. 저쪽 작은 대나무는 한 3년쯤 자랐을 것 같고, 이쪽 큰 대나무는 아무래도 10년은 자라지 않았을까?"

질문을 받은 일행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다가 대답을 한다. 그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순종 서울 토박이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이 싱긋 웃는다. 대나무는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봄에 죽순으로 땅속에서 솟아나면 한 번에 다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은 다른 일행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 한다.

 아름답고 멋진 대나무 숲길
아름답고 멋진 대나무 숲길 ⓒ 이승철

굵고 큰 대나무는 몇 년 동안이나 자랐을까?

"아하! 그래서 대나무를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그랬구나 하하하"
일행이 불현듯 생각난 듯이 하는 말이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서 대나무에 대한 노래가 떠오른 것이리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이러고도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어, 그런데 저 대나무 좀 봐? 에스자로 휘어졌잖아?"
"하하 정말 그러네, 아니야, 이건 저절로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야."

조금 걷자 길가에 정말 구부러진 대나무가 몇 그루 서있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도 신기한 듯 기념사진을 찍어 달란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대나무 숲길은 더욱 울창했다. 쏴아~ 불어오는 찬바람이 숲속을 할퀴고 지나가자 특유의 수런수런 노랫소리가 들린다.

 숲길에 서있는 멋진 정자 예향정
숲길에 서있는 멋진 정자 예향정 ⓒ 이승철

단 한해 봄에 모두 쑤욱 자라지만 속을 텅 비운 대나무, 뜨거운 태양빛과 강추위에도 의연하고 청청하게 서있는 대나무들, 그렇게 텅 빈 몸속에 바람을 간직한 대나무는 스쳐가는 바람에도 공명이 있다. 바람기 있는 인간은 삶이 부평초 같다지만 바람을 간직한 대나무는 멋진 악기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천년의 소리를 간직했다는 우리 전통악기 대금을 말하는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대금은 바람을 몸속에 간직했기에 그런 공명을 울릴 수 있으리라.

속이 텅 빈 대나무의 소박한 가르침

흙바닥에 옅게 깔린 하얀 눈을 쓸어가며 찬바람이 사사삭 지나간다. 한겨울의 대숲바람이라니,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저지른 수많은 타락의 주인공들이 대나무의 심성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몸속을 텅텅 비우고도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철을 버티며 청청한 모습으로 올곧게 서있는 대나무의 심성, 비우면 오히려 가득 채워지는 대나무의 소박한 가르침이 거기 있었다.

 채상장 작품, 수납장
채상장 작품, 수납장 ⓒ 이승철

갈림길에 들어서자 능선 왼편 아래쪽에 특이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인간문화재작품전시관이다. 이 지역 중요무형문화재 53호인 채상장(彩箱匠) 서한규 옹의 작업장 겸 전시장이었다. 채상장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어서 매우 궁금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대나무를 이용하여 섬세하게 만든 각종 공예품들이 화사하게 전시되어 있다.

채상장은 대나무 껍질을 얇게 저며 만드는 공예장인을 일컫는 이름이다. 대나무를 가늘고 얇게 저며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다음 다양한 문양이 나오도록 엮어 만드는 것이다. 채상은 옛날에는 궁중과 귀족층의 여성들이 즐겨 사용한 고급 공예품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까지 혼수용품으로 사용했다.

용도는 주로 옷과 장신구, 바느질 그릇, 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만드는 방법은 얇게 떠낸 대나무를 물에 불려 필요한 색상으로 곱게 염색하여 사용했다. 대나무 재료를 몇 가닥씩 엇갈아 가며 엮어나가고, 모서리와 테두리는 비단으로 감싸 완성했다. 무늬는 주로 길상문이나 번개, 줄무늬 등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53호, 채상장 서한규옹
무형문화재 53호, 채상장 서한규옹 ⓒ 이승철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굵은 대나무를 컵 크기로 잘라서 아름다운 문양과 채색을 한 작품들, 층층 수납장과 장신구, 그리고 다양한 생활용품들까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채상장 서한규 옹은 딸에게도 기능을 전수하고 있었다.

채상장 전시관을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숲길은 여러 갈래였다. 담양군이 나지막한 성인산자락에 조성하여 2003년 5월 개원한 대나무 수목원은 그 면적이 무려 16만 평방미터나 되었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사이에는 2.2킬로미터의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산책로 이름도 재미있다.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나 되었다.

 대나무로 가공한 채상장 재료
대나무로 가공한 채상장 재료 ⓒ 이승철

길에서 만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한참을 걸어 전망대에 오르자 시야가 시원하게 툭 트인다. 전망대에서는 읍내를 흐르는 관방천을 비롯하여 두번째로 찾았던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로 조성된 관방제림과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저, 사진 좀 한 번 부탁드릴까요?"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카메라를 내밀며 사진을 찍어 달란다. 이들은 멀리 부산에서 온 부부였다. 그들은 우리나라 남쪽지방 어느 곳에나 대나무는 많지만 이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아니, 이게 누구야? 참 반가운 얼굴이네"
"우와! 노무현 대통령이잖아? 참 그리운 얼굴이네요"

길가에 서있는 안내판 사진은 생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일행이 반가운 얼굴이라며 발길을 멈추자 뒤따르던 젊은 커플이 탄성을 지른다. 찬바람 부는 대나무 숲길에서 예상치 못하고 만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진다. 저만큼 앞장서 걷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잠간 호흡을 조절하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

 고 노무현 전대통령 방문기념 안내판
고 노무현 전대통령 방문기념 안내판 ⓒ 이승철

대나무 숲길을 돌고 돌아 산 정상에 오르자 한 떼의 청소년들이 시끌벅적 다가온다. 현장학습을 나온 고등학생들 100여 명이었다. 정상은 바람결이 더욱 뾰족하고 매서웠다. 오르막길에서 덥혀졌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금방 몸이추워진다. 내려가기로 했다.

눈이 살짝 덮여 있는 대나무숲길은 은근히 미끄럽다.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런데 길이 자꾸만 헷갈린다. 입구를 찾아 내려갔는데 아니다. 숲길에서는 장정들 5~6명이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길도 물을 겸 다가가보니 길과 숲에 왕겨를 두껍게 뿌리고 있었다.

"아! 이거 왕겨요. 추운 겨울에 대나무들 춥지 않게 보온도 해주고, 봄이 되면 썩어서 거름도 되거든요."

대나무들은 모진 추위에도 청청한 모습이었지만 추위에 약한 나무가 대나무라고 한다. 그래서 추운 겨울철이면 왕겨를 두툼하게 덮어주어 뿌리를 보호해준다는 것이었다. 길을 찾아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왕겨를 두껍게 덮은 대나무밭
왕겨를 두껍게 덮은 대나무밭 ⓒ 이승철

왕겨를 덮어주는 대나무 밭과 죽마고우의 어원

"아참! 사자성어에 '죽마고우'라는 말이 있지?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동무를 일컫는 말인데 왜 죽마고운지 알아?"

일행이 또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질문을 던진다.

"아, 그거야 내가 잘 알지, 나도 어렸을 때 많이 해본 놀이가 있으니까?"

다른 일행이 말을 받고 나선다. 그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옛날 어렸을 때 시골동네 개구쟁이들이 기다란 대나무 한 개를 여럿이 차례로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돌아다니면서 노래 부르고 놀았는데 그것을 죽마라고 했다 한다. 즉 대나무 막대기 말을 함께 타고 놀았던 친구가 죽마고우라는 것이다.

춥긴 했지만 운치있고 정겨운 대나무 숲길 산책은 참으로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행들과 도란도란 즐겁게 돌아본 담양 죽녹원을 돌아보니 어느덧 3시간이 지나 있었다.


#죽녹원#채상장#대나무#노무현#죽마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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