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비키니 시위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줄 알았다. 정봉주 전 의원이 사과를 했고 주진우 기자와 김용민 피디는 약간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김어준 총수는 개탄과 호통을 섞어서 날렸다. 넷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더라도 끝나지는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제각각 다양한 모습을 보였으니 쉽게 정리될 턱이 없다.
그런데 네 사람이 한 동아리로 똘똘 뭉쳐서 공통된 입장을 발표한 거보다 훨씬 보기 좋다. 가카에 대한 입장이 일치한다고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까지 같아야 하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개성대로 하는 거다. 그래봤자 그들 사이의 편차가 한국 사회 모집단의 그것보다 클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족을 좀 달자. 김어준 총수는 사실 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로 논쟁이 진행돼온 것을 '개탄'하는 한편, 페미니스트들이 아직도 피해자 프레임에 갇혀 있다면서 진도 좀 나가자고 '호통'을 쳤다. 나는 그의 '개탄'보다는 '호통'에 한마디 거들어야겠다.
난 이미 그 얘길 했다. 직전 글
<'마초'라는 말 좀 알고 쓰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들도 진화해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남성을 마초로 낙인 찍으며 적으로 몰아붙인다고 남녀평등이 진전될 지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동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초는 마초대로 인정하고, 엠브라는 엠브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의 세 전형 '엠브라', '마리아', '페미니스트'역사적으로 여성은 세 전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엠브라, 마리아, 페미니스트가 그들이다. 엠브라는 자연의 암컷이다. 마초의 상대어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이중적이면서 양면적이다. 성경에 나오는 두 마리아의 성향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녀이고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다. 근대 초까지 여성은 성녀를 요구받거나 창녀 취급을 받았다. 능력 있는 여성들은 두 역할을 다 소화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여성 전형은 페미니스트다. 이들은 남녀평등을 주장한다. 대부분 사회적 성 평등을 주장하는데 대부분의 남성도 여기 동조한다. 사회적 평등을 넘어서 여성 우위를 주장하는 분파도 있는데 남성들은 대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암튼 20세기 초부터 사회적 평등을 위한 여권 신장이 상당히 진척된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배가 고프겠지만 말이다.
마리아는 막달라건 동정녀건 가부장제 아래서 주조된 수동적 여성상이다. 페미니스트는 남성의 억압에 반발해서 만들어진 능동적 여성상이다. 모두 남성에 의해서 혹은 남성에 반발해서 만들어진 여성성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자기 완결적이지도 않다. 그건 이번 비키니 시위에 대한 견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순결주의자 마리아는 비키니 시위녀를 경멸할 것이다. 성의 자발적 억제라는 미덕을 팽개쳤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자 마리아는 그녀를 비난할 것이다. 별 도움 안 되는 일에 귀중한 여성성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대결주의자 페미니스트는 비키니 시위녀에게 할 말은 없(다고 하겠)지만 남성을 비난할 것이다. 비키니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 않고 비키니만 보기 때문이다(과연 그런가?).
어찌됐든 '남성이 문제다'로 끝... 독선스런 공식
두 마리아의 견해는 무시하기로 하자. 주체적이지도 실존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즘 그런 여성들 별로 없다. 페미니즘의 발전이 이룬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의 주체적, 능동적인 의견도 그다지 옳아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욕망은 가볍게 보고 남성의 욕망에 편견을 갖는 한, 이들의 진단은 언제나 "남성이 문제"로 끝난다.
변혜정 서강대 상담교수가
<"욕정대로 하면 '짐승'...김어준 마초성 문제"> 기사에서 말했다. '니가 생각하는 방식이 문제'고 '니 머리 구조가 문제'고 '니 욕망이 형성되는 방식이 문제'라고 한다. 여기서 '니'는 <나꼼수> 멤버들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남성 일반을 가리킬 것이다. '기승전'이 어찌됐든 '결'은 '남성이 문제다'로 끝난다. 이런 독선스런 공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김어준 총수는 그걸 '피해자 프레임'이라고 했지만,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암튼, 그러니 마초 페미니스트와는 대화하기가 싫다. 결론이 언제나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1세기 동안 마초와 싸우면서 스스로 마초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힘의 성대결이 계속될 수 밖에. 성대결이 계속되는 한, 손해는 아쉬울 것 없는 1%가 아니라 자원 부족에 상시적으로 허덕이는 99%가 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역설적으로 엠브라에 기대를 건다. 마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기 엠브라성을 꽃피우는 여성들 말이다. 꼭 문명과 역사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일 필요는 없다. 진정한 성평등은 마초와 엠브라가 파트너가 되어 이룰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마초'라는 말을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하는 적의(敵意)적 맥락에서 구해내야 하고, '엠브라'에도 풍부한 문화적 함의를 실어주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도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사실 이미 엠브라가 대세다. 이들은 성적 순결주의자도 아니고 성적 실용주의자도 아니고, 성적 대결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런 주의자가 될 수 있고, 혹은 다른 어떤 것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린 문제다. 남성이 얌전한 순둥이가 되거나, 뻗대는 마초가 되거나, 그들에게 달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초건, 엠브라건, 자기 선택의 결과는 물론 자기 책임이다. 마초와 엠브라가 공적(公敵)으로 삼아야 할 것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이다. 요즘 같은 분위기면 페미니즘도 그런 억압구조가 될 수가 있다. 그러니,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이걸 근거 없는 막말로 보지 말기 바란다. <타임>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1998년 6월 29일) 커버스토리에 "페미니즘은 죽었나?"를 실은 적이 있다. 2008년에 발간된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사회학 보고서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이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걸 싫어할 뿐 아니라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인다고 서술한 바 있다.
미국이나 영국 따라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미리 대비하지 않는 걸까? 스스로 먼저 변신하지 않는 걸까?
엠브라는 이미 페미니스트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카-한나라당 체제 아래서 기가 죽어버린 마초들의 '쫄지 마' 운동을 격려하고 동참한다. 김어준 총수 같은 잘난 마초이든 마초 깜도 못되는 나 같은 무지랭이든, 남성이 바라는 건 경직된 마초 페미니즘이 아니라 따뜻한 엠브라다. 바로 거기에 사회적 평등뿐 아니라 전체적인 성평등의 앞날이 달려 있다고 나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