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어울리는 음식이 있다. 봄에는 식초로 산뜻하게 맛을 낸 냉이무침, 여름에는 얼음 둥둥 뜬 오이냉국, 가을에는 연기 폴폴 나는 전어구이, 겨울에는 따끈한 호박죽, 군밤 그리고.....에스프레소!
그렇다. 진하디 진한 에스프레소는 겨울에 꼭 어울리는 커피다. 어느 커피점에나 파는 가장 싼 메뉴지만 섣불리 마시기엔 너무 강하다고 외쳐대는 그 커피. 마니아들만이 참 맛을 아는 짙은 갈색의 크리미한 그 액체는 적어도 두터운 외투로 무장하고 눈발 흩날리는 2월에 마셔야 특유의 운치가 생동하는 커피다.
길가 아무데나 서 있는 카페에 들어가 추위로 발갛게 물든 입술을 에스프레소 한 모금으로 적시면 명절날 시골 큰집에서 맞이하는 새벽 정취가 찻잔 속에 슬며시 떠오르고, 은근히 밀려오는 장작 타는 냄새와 더불어 적당히 매큰한 향은 깊고 그윽한 서정을 불러 온다. 에스프레소 위에 풍성한 휘핑크림을 얹은 에스프레소콤파냐도 그럴싸하지만, 진정 커피의 정수를 즐기고 싶다면 짙은 에스프레소만한 것이 없다.
그런 한편 커피의 또 다른 매력을 가진 것으로서 예가체프(Yirgacheffe)도 빼 놓을 수 없다. '꽃향기가 나는 커피', '쌉싸래한 여운 뒤에 향긋한 와인향이 풍기는 커피'라는 커피점 메뉴판의 낭만적인 설명글에도 보듯, 이 커피는 아무 자리에나 함부로 끼지 않는 신비한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예가체프의 원두는 에티오피아 남부 예가체프(Yirgacheffe)의 고도에서 재배되어 주로 10월~3월경에 수확된 후 약 3일간 발효액에 담가지는 독특한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해 생두 속의 당분이 발효되면서 그 맛이 바뀌고, 수세식이란 특성상 카페인 함량도 적어지게 된다. 인간이 인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큰 내면적 성장을 하고, 다가올 미래에는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나 할까? 쓴맛 떫은맛이 씻겨나가는 수세 과정을 통해 산도가 강해지고 종국에는 꽃내음을 가진 커피로 변모, 더 나아가 와인 향을 스치게 된다는 점에서 꼭 입지전적인 인물의 인생사에 비할 만하다.
한편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원산지로서 커피산업이 이 나라 경제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커피라는 이름도 에티오피아의 'Kaffa'라는 지방 이름에서 유래됐을 만큼 에티오피아 커피는 커피 역사에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한 마디로 에티오피아인에게 커피는 삶 그 자체라 할 만하다. 더욱이 에티오피아 인구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오로모족의 전투식량으로 커피가 쓰였다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며, 그들의 기도문에는 커피가 이 나라인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커피주전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아이들을 자라게 하며,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나이다. 부디 우리를 악에서 보호하여 주시옵고 우리에게 비와 풀을 내려주시옵소서.'이처럼 일상에서 커피를 가까이 하는 에티오피아인에겐 동양의 '다도'처럼 '분나 마프라트'라는 커피 예법이 있다. 이를 통해 커피는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 된다. 가정에서 여자들은 석탄을 피워서 그 위에 프라이팬을 올린다. 이윽고 달궈진 팬 위에 원두를 쏟아 붓곤 재빠르게 흔들어 커피를 볶고, 볶아진 원두를 곱게 빻는다. 이윽고 주전자에 물을 끓인 후 좀 전에 빻은 커피가루를 넣어 부글부글 끓여서 커피를 만든다.
별다른 커피용품이나 값비싼 찻잔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성심을 다해 손님을 대접할 요량으로 커피를 끓이고, 한편으론 신에게 감사하며 경건히 마시는 그들에게 이 얼마나 정중한 로스팅인지! 커피머신을 툭 누르면 윙하고 기계가 돌아가서 뚝딱 만들어지는 현대의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적 풍취가 그 찻잔 안에 가득할 것만 같다.
"할인 해드렸으니 적립스탬프는 못 찍어드려요."시큰둥한 얼굴의 종업원이 내미는 잔에는 반도 차지 않는 에스프레소 도피오(에스프레소 두잔 분량을 하나의 잔 안에 넣은 것)가 들어있다. 커피를 마시는 예법이나 인간적인 서정 같은 것은 현실의 대량화되고 상업화된 세계에 불필요하다는 듯이 그들은 그저 한 잔에 얼마의 원가가 들어가고, 얼마의 손님이 팔아줘야 이득이 남는다는 식의 계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만 원이 호가하는 에스프레소 잔이 하루에 얼마나 팔리는지, 에스프레소 양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손님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도 귀찮을 뿐이고, 적립 스탬프를 모아 온 손님에게 반잔도 안 되는 공짜 커피를 베풀며 인심을 쓴 듯이 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내려주는 커피는 그저 쓴맛과 적당히 단맛이 가미된 문명의 음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보자면 대량화된 커피가 가진 편리함과 더불어 커피 스토리가 상실된 쓴 액체를 우리가 폼을 재고 마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커피가 있는 분위기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적어도 커피는 들뜨고 격한 논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료며, 한 모금 마실 때 마다 자신의 내면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묘한 성격을 가졌다. 술이 있는 자리의 끝에는 흔히 싸움이 일어나지만 커피가 있는 곳에는 어쩐지 고상한 이야기가 내심 우러나오게 된다. 더욱이 커피 문화가 꽃피는 곳은 언제나 그 시대의 권력을 쥐었고, 프랑스 혁명 역시 커피가 있는 살롱에서 시작된 것만 봐도 커피가 가진 묘한 매력을 잘 알 수가 있다.
겨울! 커피가 유난히 그리운 계절이다. 커피 한 잔에 시름을 잊고 창 너머 먼 산에 눈길을 주면 평온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고, 그럴 때 후드득 겨울비라도 창을 두드려 멋진 서정을 만들어냈음 딱 좋겠다. 계절이 가고 오고, 사람도 가고 오고, 문화가 창조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듯 한 잔의 커피도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 뙤약볕 아래 흑인들은 커피나무를 심고 가꾸고, 열매를 수확하고, 그것은 저 멀리 바다를 건너 어느 커피 애호가의 손 안에서 한 잔의 커피 향과 맛과 운치로 살아난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근사하다.
커피의 계절 겨울이 가고나면 청신한 봄을 닮은 산뜻한 음료가 유혹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그러기에 겨울 동안이라도 고이고이 아껴 마셔야 할 음료가 커피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오랜 세월을 짝사랑으로 일관하고 그제야 입을 열어 고백 했건만, 지나치는 인연에 다시 마음을 접고 아파하는 사내처럼 이 겨울의 에스프레소는 수줍고도 과묵하다.
반면에 섬세하고 우아한 풍미의 예가체프는 그런 남성을 포근히 감싸주는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며, 이 겨울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 두 커플이 있어 겨울날의 티타임이 더없이 즐겁다. 따끈한 커피가 유달리 그리운 겨울 끝자락. 당신은 어떤 커피를 마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