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화가들은 중국의 여러 화풍만이 아니라 서양의 회화기법까지 받아들여 이를 자기화한다. 즉, 당시의 회화 양식으로 볼 때에는 이색적인 화풍의 그림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인상, 이윤영에서 비롯된 새로운 기풍은 정수영과 윤제홍을 거쳐 김수철, 김창수, 홍세섭, 조정규, 남계우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자유분방한 정신으로 실험성 있는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근대화되어가는 시대의 모습을 그림에 반영하였다. '19세기의 이색 화풍'이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최열은 19세기 중엽을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 나비만 그린 '남나비' 남계우
남계우는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을 고조부로 둔 사대부 화가였다. 본인도 종2품까지 올랐다. 그는 38세에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남계우는 나비만 그렸다는 점에서 소재 소택에서도 특이한 화가였다. 90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 중 90%가 나비그림이었으니, 그에게 '남나비'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야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비를 좋아하여 열여섯 살 때는 집에서 본 나비에 반하여 10리나 뒤따라가서 잡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과학적 요소들을 그림에 받아들인 화가로 평가받는다. 화려하면서도 정밀한 그의 나비 그림은 박물학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그래서 후대의 생물학자 석주명조차도 그의 그림을 보고는 생물학적 기초지식이 철저하게 투영되었다고 감탄하였다. 다른 화가들이 중국 그림 속의 나비를 보면서 그린 것과는 달리 남계우는 우리나라 나비를 그린 '한국화' 화가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부감법의 홍세섭
공조판서의 아들이면서 본인도 우부승지까지 오른 홍세섭도 사대부 화가였다. 홍세섭의 대표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모절지도'인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을 보여준다. 이는 동양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도로, 중국 해파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홍세섭의 회화는 전통적인 수묵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수직적인 구도와 강렬한 흑백의 대비, 운동감의 과격한 표현 등 서양화의 기법을 자기화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대부분의 문인화가들이 화보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린 데 반해 홍세섭은 화보에 없는 화면 구성과 신선한 필치를 선보였다.
이동민 저 <조선 후기 회화사 (19세기)>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본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의 작품 이외에는 우리나라 그림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미술애호가들에게 아주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다. 글의 머리 부분에서 거론한 남계두, 홍세섭 등에 대한 소개도 이 책의 여덟 번째 꼭지인 '19세기의 이색 화풍'을 일부 요약한 것이다.
<조선 후기 회화사>는 모두 23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화가와 화원 제도, 대청 교류와 중국 그림의 유통, 19세기 조선 회화에 나타난 중국의 영향, 화원 가문의 세습, 19세기의 풍속화, 19세기의 춘화, 세화(歲畵), 민화의 유행, 조선 후기의 화론, 여항 화가, 19세기의 남종화, 장승업, 완당 바람, 서양화의 도입, 조선 후기의 불화 등 목차를 일별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우리나라의 19세기 회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저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꼭지인 '조선 후기의 불화' 중 일부를 발췌 요약하여 읽어보자.
유학자 중심 조선미술사, 불화 소홀하게 취급
유교이념의 통치시대였던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였다. 미술사도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불화는 아주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자연스레 조선의 불화는 귀족 취향의 장식성에서 민간신앙을 더욱 수용한 다양성과 대중성의 경향으로 옮겨갔다.
현재 남아 있는 불화의 대부분은 18~19세기의 작품이다. 불화는 낡으면 태워버리고 새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유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 후기 들면서 불화 불사가 많아져 그 시대의 작품 수가 크게 늘어난 때문이기도 하다.
불화 중 경기도 지역의 작품은 궁궐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에 후원자인 비빈이나 상궁 등 발원자의 취향에 맞춰 제작된 경향이 농후했다. 꽃 문양으로 의단을 장식하거나 금니를 사용하는 등 최대의 장식성을 추구한 것도 이 때문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기도 불화의 특징이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비교적 전통성을 잇는 불화들이 그려졌다. 하지만 경상도에도 19세기에 들면서는 신경향의 작품이 나타났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경상도로 무대를 옮긴 진철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진철은 서울의 봉은사, 금강산의 안양사 등을 그렸는데, 후에 경상도의 직지사, 통도사, 은해사, 해인사에 불화를 남겼다.
전통과 변화의 소용돌이를 보여주는 19세기 회화
30년 이상 미술 공부를 한 저자 이동민은 "한국미술사에서 19세기 회화는 전통과 변화가 소용돌이치는 현장이었지만 영정 시대에 비해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다"면서 재야 미술사학자 이동주 선생의 저술 <한국회화사론>을 본보기로 하여 <조선 후기 회화사>를 저술할 엄두를 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문서 <한국 근현대 서예사>, 수필평론집 <수필, 누구를 쓸 것인가>, 육아서 <우리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가>, 수필집 <우리 시대의 이야기> 등을 펴낸 바 있으며, 현재 대구문인협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