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밑도 끝도 없이 기사 첫머리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반문할 독자 분들이 분명히 계실 터. 그러나 사실 이 말 외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게, 바로 요즘 <해를 품은 달>의 인기다.
MBC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의 시청률이 연일 상승세다. 방송 첫 회에 18.0%(AGB닐스미디어리서치 전국기준)라는, 요즘 동시간대 1위 드라마들이 방송 마지막회에 가서야 달성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방송 중반이 넘어간 지금은 40% 고지를 바라보고 있다.
시청률 15% 정도만 되어도 동시간대 1위를 하는데 별 무리가 없고, 20%를 넘기면 성급한 언론에서 앞다퉈 '국민 드라마' 칭호를 붙여주는 이 때, <해품달>의 시청률은 가히 '경이로움' 그 자체다.
연예기사, 그 중에서도 드라마 기사를 주로 쓰는 입장에서 <해품달>에 대해 그 인기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예측하는 기사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며칠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이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명쾌하게 글로 풀어낼 수 없었다. 하여 창피를 무릅쓰고 <해품달>의 등장인물들에게 직접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많은 등장인물들이 바쁜 촬영시간에도 짬을 내 기사에 동참해줬다. 다음은 촬영장 근처 은월각 한켠에 기자가 마련한 자리에서 <해품달>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힌 등장인물들의 대화 전문이다.
<해품달> 인기 요인 1. 무서운 신예 김수현
훤 : "흠흠, 다들 모인 것 같으니, 할마마마. 말씀하시지요."
대왕대비 : "아닙니다, 주상. 주상이 계신데 어찌 이 할미가…."
훤 :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시니 할마마마께서 포문을 여시는 게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보경 : "신첩의 생각 또한 그러하옵니다, 마마."
대왕대비 : "주상과 중전이 할미를 이리 위해주니 참으로 고맙구려. 오늘 이 자리가 <해품달>의 인기에 대해 논하는 자리라고 들었는데,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소. 무릇 드라마란 주인공이 중심을 잘 잡고 이끌어나가야 백성들이 빠져드는 법. 하여 내 좁은 소견으로는 우리 주상의 깎아놓은 듯한 미모와 선배 연기자들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출중한 연기력이 지금의 <해품달>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보오."
훤 : "과찬에 소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대왕대비 : "후훗. 주상, 고마우신 겝니까?"
훤 : "물론입니다. 여러 대신과 뭇 백성들이 모인 자리가 아니옵니까. 이런 곳에서 소손의 면을 이리 세워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대왕대비 : "허면 주상께서 이 할미에게, 빚 하나 지신 겝니다."
훤 : "…."
형선 :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실 우리 전하가 이리 사극 연기를 잘 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표정이면 표정, 발성이면 발성, 뭐 하나 부족한 게 있어야지요. 이른바 '궁궐 로맨스'라는 새 장르를 개척함에 있어 우리 전하께서 수려한 용모와 빼어난 연기력으로 여심을 단박에 사로잡으니 시청률이 올라감은 물이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고,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사옵니까?"
훤 : "형선아, 달이 차면 기운다 하였느냐? 그럼 <해품달> 또한 찰 만큼 차면 언젠가는 기운단 뜻이냐?"
형선 : "그, 그건…."
훤 : "내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그 입이 방정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분간 돌아서 있거라."
형선 : "……"
<해품달> 인기 요인 2. 개성 강한 조연배우들의 존재
영의정 : "소신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임금이 사대부 없이 정치를 할 수 없듯이, 드라마 또한 주연배우가 조연배우 없이 홀로 이끌어갈 순 없는 법. 소신 등이 전하와 대립각을 세우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어찌 지금의 <해품달>이 있을 수 있었겠사옵니까?"
대왕대비 : "그렇지요. 이 할미가 모사를 꾸며 방송 첫 회에 의성군을 죽여 없애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의성군을 연모하던 무녀 아리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아리의 유지를 받은 무녀 장씨가 허씨 처녀를 거두게 되었으니, 이 가혹한 운명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이 바로 이 할미 아닙니까?"
영의정 : "모사를 꾸민 것은 대왕대비마마이시나 그것을 실행하고 손에 피를 묻힌 것은 신이지요. 어찌 마마 혼자 다 하셨다고 하십니까?"
대왕대비 :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게) "네놈이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오른 줄 알고, 지금 뉘 앞에서 유세를 떠는 것이냐?"
영의정 :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게) "이 빠진 암호랑이가, 아직도 제가 숲의 주인인 줄 아는군."
장녹영 : "두 분께서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이 있는데, 기실 <해품달>에서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무엇이옵니까? 무엇이 <해품달>을 보는 백성들로 하여금 가장 가슴 아프고 저미게 한단 말입니까? 바로 월이의 기억상실증이 아닙니까? 그 기억상실증이 누구로 인해 비롯되었습니까? 제가 약을 먹이고 그 깨어날 시간을 미묘하게 잘못 잡은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허니, <해품달>의 일등공신을 꼽으라 하시면 소인 또한 마땅히 그 상석을 차지할 권리가 있지요."
대왕대비 : "천한 무녀 따위가 어디 웃전 말씀하시는 데 끼어드는 것이냐? 애초에 네가 허씨 처녀를 해할 마음을 먹은 것 또한 내 명이 있었기 때문 아니냐?"
장녹영 : "그러나 그녀를 죽이지 않고 잠시 가사 상태에 빠지게 한 것은 순전히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지요. 그러니 그것은 온전한 제 공이란 말입니다."
대왕대비 : "네 이년…."
훤 : "듣고 있으니 성수청 국무의 말에 일리가 있다. 국무 장씨가 할마마마의 명을 충실히 받들어 연우 낭자를 죽여 버렸다면 드라마는 거기서 끝, '백성 여러분 지금까지 <해품달>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했을 것 아니냐. 그랬다면 내가 여기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선의에서 비롯한 실수 탓에 하늘이 정한 운명이 꼬이고 어긋나 지금에 이르렀으니, 성수청 국무 장씨의 공 또한 크다 할 수 있다."
<해품달> 인기 요인 3. 아역배우들의 열연
허염 : "소신이 생각하기로, <해품달>이 이리 인기가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전하를 비롯한 주연배우들의 어린시절 연기가 일익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훤 : "아니, 의빈. 자네도 이 자리에 있었나?"
허염 : "예?"
훤 : "하도 존재감이 없어서 내 자네가 와 있는지도 몰랐네그려."
허염 : "전하. 어찌 그런…."
양명군 : "전하, 놔두시지요. 사실 의빈이 어린시절에는 좀 잘 나갔습니까? 17살에 문과 장원급제하여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궁에만 들어서면 그 출중한 미모에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후광이 덧씌워져 궁인들이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였으니. 게다가 분량은 또 좀 많았습니까? 어린시절이 방영되던 6회까지 의빈의 비중이 이 양명에 비해 적었다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얼굴 한 번 보기가 힘이 드니. 게다가 얼마 전엔 전하께서 영남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오란 명까지 내리셨지요. 이래저래 의빈으로서는 과거지사를 이야기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허염 : "그,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시청률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전하와 신들의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그리 애달프고 절절하지 않았다면 어찌 지금의 <해품달>이 있었겠사옵니까? 신은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양명군 : "그래, 그래. 내 잘 알겠네. 내 자네의 진심을 전하께 진언할 터이니 자넨 이만 공주자가한테나 가보게나. 영남지방에서 사림세력을 규합하다 말고 곧장 이곳으로 올라와 아직 집에는 들르지 않았다지? 우리 귀여운 공주자가가 매일 밤 자네를 그리며 하루를 달포처럼 지새우고 있다네. 어서 가보게. 어이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공주자가가 와 있구먼."
공주 : "서방니임~. 이리 빨리 올라오셨으면서 어찌 소첩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이어요?"
민 상궁 : "공주자가. 제발 체통을…."
훤 : "음, 의빈이 참으로 불쌍하군. 요즘 극에서도 참 드문드문 나오는데, 여기에서마저 말 몇 마디 못해보고 공주에게 끌려갔으니."
영의정 :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언론과 관련한 대외활동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의빈이 이런 자리에까지 나선다는 것은 의빈의 도가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전하. 이 일과 관련하여 의빈에게 죄를 엄히 물으소서."
훤 : "거참 영상도 어지간하시오. 그 행실의 잘잘못이야 어찌됐건 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질 않소. 기실 어린시절 과인과 연우 낭자, 그리고 양명 형님이 어린아이의 풋풋함과 때묻지 않은 싱그러움으로 백성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날의 <해품달>이 있을 수 있겠소?"
영의정 : "전하와 허씨 처녀, 양명군의 사랑이 더 빛나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신을 비롯한 기성세대의 권력투쟁에 휘둘려 전하들의 사랑이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옵니다. 신들의 공 또한 가벼이 여기시면 아니 될 것이옵니다."
훤 : "영상의 숟가락 얹기 신공은 언제 봐도 놀라운 경지요."
<해품달> 인기 요인 4. 로맨스와 권력투쟁... 두 마리 토끼 모두 잡다
월 : "소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옵니다. <해품달>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균형이 맞기 때문이 아닌지요."
훤 : "균형이라?"
월 : "그러하옵니다. 궁중 로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이옵니다. 허나 사랑 하나만 갖고 떠들기엔 1시간이란 시간은 너무 길지요. 그런데 <해품달>은 사랑뿐만 아니라 임금과 신하 간의 권력투쟁 또한 흥미롭게 펼쳐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주연배우들의 사랑에 장애물이 되는, 양념에 그치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싸움을 말입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볼 때 소인과 전하의 사랑 또한 이 권력투쟁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지요. 계속해도 되오리까?"
훤 : "계속하라."
월 : "대대로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한 조선이 아니옵니까? 게다가 선대왕이신 성조대왕은 역신들의 반란을 외척세력에 의해 몇 번이나 막아내고 겨우 왕권을 지키셨던 분. 그 외척이 공신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고 있으니 이는 전형적인 조선의 정치사가 아니옵니까. 비록 가상의 역사라곤 하나 실제 역사와 매우 흡사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의 고뇌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신권을 강화하려는 신료들의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지니, 극의 균형이 맞고, 재미가 더해지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훤 : "음, 네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다. 드라마의 저간에 깔린 그러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니, 과연 성수청 국무 장씨의 신딸답게 신력이 대단하구나."
월 : "후훗, 이것을 신력이 아니라 논리이옵니다, 전하.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은 소인에게 이 정도의 사고쯤이야 별 것 아니옵니다."
훤 : "자, 이제 슬슬 촬영장에 복귀해야 할 시간이오. 이 따뜻한 곳에서 나가 다시 추운 촬영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끔찍하오만, 뭐 벌어먹고 살려면 어쩔 수 있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이 있다면 다 털어놓으시오. 운아, 너는 무슨 할 말이 없느냐?"
운 : "……"
훤 : "물은 내가 바보다."
양명군 : "전하, 소신은 이제 어찌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제가 월과 잘 될 가능성은 1할 미만. 그렇다면 저는 누구와 맺어지게 됩니까? 통상 로맨스 드라마의 사각관계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이루어지면 나머지 남은 두 사람이 잘 될 가능성을 보이며 극이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하와 월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중전마마와 소신 아니옵니까? 설마하니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폐비 삼으시고 제가 궐에서 쫓겨난 중전마마와 야반도주를 하는 설정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제가 교태전에 들어 중전마마를 보쌈해 궐 담을 넘는다던가, 뭐 그렇게까지 막장으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훤 :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형님? 가까운 곳에 형님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잖아요. 어린 시절 형님이 구해준 성수청의 그 아이."
양명군 : "설마, 잔실이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훤 : "왜, 싫으신 겁니까?"
양명군 : "아하하,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다 꾸려놨는데 이리 지체를 하다니. 전하,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시옵소서. 신은 이만."
훤 : "이제 형님은 정리가 됐고…. 다른 분들 또 없으시오? 없다면 이만 마치겠…."
보경 : "전하."
훤 : "왜 그러시오, 중전? 할 말이 남았소?"
보경 : "관상감에서 잡은 합방일이 내일이옵니다. 행여 잊진 않으셨겠지요?"
훤 : "……"
보경 : "왜 말씀이 없으신 겁니까?"
훤 : "으윽."
보경 : "전하?"
훤 : "가, 가슴이…."
보경 :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전하!"
좌중 일동 : "전하! 전하!"
대왕대비 : "밖에 아무도 없느냐? 당장 어의를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