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의 혁명 없이 새로운 정치는 없습니다. 진심의 문을 열어 더 양보하고 야권연대의 감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심정으로 통 크게, 더 많이 양보하고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3일 민주통합당에 입당했습니다. 인권변호사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의 상임이사로 평생 시민운동만 해온 그에게 입당식은 매우 낯설어 보였습니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면서 정당문화를 간접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월 당비 내는 당원으로 정당에 가입한 것은 아마 박 시장 생애 첫 경험일 것입니다. 그동안 그가 어느 정당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박 시장이 이날 오전 9시 30분께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2층 민주통합당 당대표실을 찾았습니다. 입당 기자회견을 위한 순서였지요. 그는 국회에 도착한 뒤 당대표실의 한켠에 마련된 좁은 방에서 한명숙 대표와 약 5분간 면담한 뒤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100여 대의 카메라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입니다.
한 대표가 앞서 들어간 뒤에 카메라 플래시가 타타타탁 터지니 한 템포 발걸음을 쉬더군요. 그리곤 "아휴"하는 짧은 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약 15도 갸웃한 상태에서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어쩐지 박 시장에게는 아직도 이런 자리가 썩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수줍음 많은 그에게 카메라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인 모양입니다.
"섣부른 자만이 전혀 다른 결과로 우리를 몰아갈 수도"그런 그가 "2012년은 거대한 전환, 새로운 시작의 해"라며 "작은 힘이나마 더 큰 통합과 진정한 변화를 위해 보태겠다"며 민주통합당에 입당했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야권연대였습니다. 더 많이 양보하고 헌신해서 반드시 야권연대를 성사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야권대통합의 정신과 시민정치의 염원을 바탕으로 당선됐다는 점을 다시 또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민주통합당에 입당한다"며 "민주통합당이 통합의 깃발이 되고 변화의 물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평당원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소명, 새로운 변화를 위한 소임을 다할 것"이라며 "민주통합당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그는 "(민주통합당은) 아직 이기지 않았다"며 "섣부른 자만은 우리 모두를 전혀 다른 결과로 몰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박 시장은 또 "공천의 혁명 없이 새로운 정치는 없다"며 "진심의 문을 열어 더 양보하고 야권연대의 감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민주통합당이 구체적으로 국민의 삶을 바꿔어낼 수 있는 작고 일상적인 생활정치에 나서기 바란다"며 "전국 광역자치단체장회의를 소집해 구체적인 정책논의를 시작할 것을 요청한다"고 제안했습니다.
50여명 의견청취한 끝에 결정한 민주통합당 행
그가 쓴 '입당의 변'에도 고심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 야권연대로 당선됐다는 점을 매우 깊게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혹여 민주통합당 입당이 통합진보당 등 다른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 누가 되지 않을까 생각의 생각을 거듭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 흔적은 그가 이날 기자들에게 '입당의 변'과 함께 보낸 '입당 관련 시민사회 및 정당 의견수렴 과정'을 읽어보면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입당 문제와 관련해 시민사회 원로, 상근활동가, 통합진보당 대표단과 서울시당 공동위원장단, 진보신당 대표, 창조한국당 대표, 민주노총 위원장, 심지어 박원순 팬클럽 회원들까지 만나 의견청취한 내용을 별첨으로 붙였습니다. 족히 50여 명의 의견을 듣고 그는 민주통합당 행을 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박 시장은 "지난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드러났듯 야권연대는 시대적 요구라는 사실과 그때의 대통합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며 "입당 후에도 야권연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 "오늘 밤이 마지막 협상이 될 것"그러나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야권연대의 전망이 어둡습니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오늘 밤 접촉이 있을 예정이나 안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우리 혼자만 이런저런 제안을 하고 있으니 야권연대의 기본 원칙이나 방법론이 전혀 도출되지 않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터뜨렸습니다.
유 대표는 "오늘 밤이 마지막 협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민주당 지도부가 나서서 이번 야권연대의 원칙을 천명하고 적극적인 합의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천호선 통합진보당 대변인도 "야권연대 협상이 교착에 빠져 있다"면서 "민주당의 지도부가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야권연대 협상에 임해줄 것을 요청드린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박 시장의 입당에 대해서는 "지금 입당하는 것이 박 시장을 지지해준 서울시민 대다수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 시기의 입당이 야권연대와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판단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천 대변인은 "박 시장 나름대로의 고민과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며 "이미 결심한 일이라면 민주당 내에서라도 서울 시정에 대한 다른 정당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야권의 연대와 단결을 위해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습니다.
어쩌면 박 시장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함께 했던 민주진보진영이 선거경험을 바탕으로 '통합'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양당이 통합하는 날 입당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박 시장뿐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기대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통합은 물 건너갔고, 남은 건 야권연대뿐인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첨예한 지점에 이를수록 제자리걸음을 하는 중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이번 야권연대 협상은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에 15석을 양보하거나 완전히 깨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 앞에서 민주통합당이 박 시장의 메시지대로 '허벅지의 살을 베어내는 심정으로 통 크게, 더 많이, 양보하고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을까요? 혹시 '야권연대 협상 타결!' 낭보를 곧 들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