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의 대나무밭 죽녹원은 참으로 아름답고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죽녹원을 둘러본 후 근처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충남 서산, 날씨는 여전히 매섭도록 싸늘했다. 서산의 대산읍을 지나 운산리 쪽으로 가는 길, 길가의 풍경이 담양의 들녘 풍경과는 다가오는 느낌이 왠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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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호수 보이지? 저건 바다가 아니라 대호방조제 안쪽의 호수야"운산리에서 친구부부를 만나 들길을 걸으며 친구가 하는 말이다.
"담양이나 서산이나 똑 같은 들녘인데 왜 느낌이 다르지?"담양여행을 함께한 일행이 묻는다. 그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던가 보았다. 서산 친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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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저거야. 저 갈대들 때문이야. 이 황량한 느낌""그렇구먼, 담양의 논들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보리파종이 되어있었는데, 이곳 논들은 그냥 방치된 채 논두렁과 개울이 온통 갈대와 억새로 뒤덮여 있잖아?"
일행 두 사람이 금방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담양의 들녘은 겨울이었지만 왠지 그냥 텅 빈 느낌이 아니었다. 2모작으로 파종한 보리가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산의 들녘은 가을걷이 후 그냥 방치된 채 갈대와 억새꽃이 바람에 휩쓸리는 마냥 쓸쓸한 풍경이었다.
"우리 저 길 한 번 걸어볼까? 저 쓸쓸함에 한 번 젖어보게""우와! 늙어가면서 낭만파가 되어가다니, 멋쟁이네, 멋쟁이야, 하하하"다른 일행들의 놀림에 멋쩍어 하면서도 차에서 선뜻 내려 앞장서 걷는 친구의 뒷모습이 텅 빈 들녘처럼 쓸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젊은 시절엔 삶이 너무 바빠 잊고 살았던 감성이 늘그막에 슬그머니 되살아난 때문이리라. 다른 일행들도 그를 따라 썰렁한 논둑길을 천천히 걷는다.
서로 다른 남도와 충청도의 겨울 들녘풍경 "오늘 우리들 흙길 한 번 실컷 걸어 볼까?"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있는 논둑길이었지만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논둑길이라지만 길은 제법 넓었다. 옛날처럼 지게와 쟁기로 농사를 짓지 않고 기계화되었기 때문이다. 트랙터와 경운기가 다니는 논둑길이어서 일행들 몇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지 않았다. 상당히 드넓은 들녘의 끝에 솟아있는 나지막한 산들이 고향처럼 정겹다. 호숫가엔 우리들 외에 아무도 없었다.
"저 호수가 대호만이라고 했지? 물은 썩지 않았나?""잘은 모르지만 괜찮은 것 같아, 이 지역 농사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친구는 작년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아직 농사를 짓지 않아서 이 지역 실정에 밝지 못한 듯했다. 호숫가엔 키가 큰 갈대들이 즐비했다. 지난 가을에 피어났던 갈대꽃들은 색이 바래 시들했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대호만 입구에 방조제를 쌓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면 이곳 호수가 온통 갯벌로 들어나 더 멋있었을 텐데."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일행 한 사람은 호수로 변한 대호만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옛 시절 풍경에 대한 향수는 더 깊고 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매년 몇 번씩은 바닷가를 찾아 향수를 달랜다고 한다. 그는 이곳으로 귀향한 친구가 부럽다고 했다.
"지난여름에 이 개울에 나와서 우렁이를 이 만큼 잡아 된장찌개 한 번 맛있게 끓여먹었는데."귀향친구가 두 손을 마주 모아보이며 하는 말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직하고 몇 년 동안을 별러 귀향한 친구는 고향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논두렁 아래 좁은 수로는 갈대줄기와 잡초들이 얼어붙어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그래도 그 좁은 수로와 논두렁에 수많은 생명들이 봄을 기다리며 동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통 죽은 듯 얼어붙어 있는 대지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어, 춥다, 이제 그만 삼길포로 나갈까?일행이 어깨를 움츠린다. 젊었을 땐 추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는데, 근래 들어 부쩍 추위를 탄다는 그의 어깨가 왠지 작고 힘이 없어 보인다. 모두들 추위를 느끼고 있었는지 군소리 없이 차에 올랐다. 우리들이 탄 승합차는 친구 부인이 운전하는 승용차 뒤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삼길포에 거의 도착할 즈음 왼편 나지막한 산으로 올랐다. 바다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곳에 어설픈 정자와 전망대가 서있었다. 정자 앞에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서있는 두 개의 장승에는 '서산 아라메길 전망대'라 쓰여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오밀조밀 아기자기한 대호만 입구 바다와 해안선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추운 날씨에도 아름답고 정다운 서해 바닷가 풍경바람이 거센 때문인지 고기잡이 하는 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정겹다. 전망대를 내려오니 바로 삼길포 포구다. 대호만 하구를 가로막은 방조제 아래 작은 포구는 바람결이 차가워서인지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선착장에 정박하고 있는 작은 배 위에서 손님을 부르는 아낙네들의 목소리가 날씨만큼 쨍쨍하다.
어선들은 생선을 소매하고 있었다. 고기잡이 배라기보다 생선을 파는 역할이 큰 듯했다. 선착장 바닷가 도로 옆엔 작은 소공원이 조성되어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손바닥을 펼쳐 세워놓은 모형의 조형물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낯설지 않다. 그러나 기울어진 하트모양의 조형물과 그 아래 벌거벗은 두 명의 남녀 청동상 아기모습은 너무 추워 보인다.
근처에 있는 횟집을 찾아들었다. 몇 마리의 살아있는 우럭과 생선들을 주문했다. 서해에 있는 포구여서 값이 저렴할 것이라는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일행이 일곱 명이어서 십만 원어치를 샀지만 양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선회를 배불리 먹을 수는 없겠지만 얼큰한 매운탕을 곁들이면 소주 몇 잔씩을 곁들인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나온 회를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행들의 얼굴이 화기애애하다. 다만 운전대를 잡아야할 일행과 친구의 부인이 많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주인이 다가와 매운탕을 주문할 것이냐고 묻는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모두 매운탕을 들겠느냐고 재차 묻는다. 웬 생뚱맞은 물음인가 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서해 작은 포구 생선 횟집에서 바가지 쓴 매운탕 추운 겨울날 바닷가 작은 포구에서 먹는 생선회와 매운탕은 정말 맛이 좋았다. 더구나 술을 즐기는 일행들 몇 사람은 그야말로 맛이 짱이라며 좋아한다. 담양여행에서는 주로 죽통밥과 함께 떡갈비를 즐겨먹었었다. 한 마디로 얼큰한 매운탕과 생선회가 많이 그리웠던 일행들이었다. 현지의 친구부부도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음식 맛이 좋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방바닥도 따끈하고 좋았다. 그렇게 한 바탕 즐겁고 맛있게 먹고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방에서 얼큰한 매운탕에 소주를 마신 일행들이 문밖으로 나서며 "어, 시원하다"며 느긋한 표정들이다. 그런데 잠시 후 계산을 끝내고 나온 일행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본래 횟집에서 생선회 시켜 먹으면 매운탕은 그냥 끓여주는 것 아닌가?"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생선 횟집에서 매운탕 끓여주는 것은 일반화 되어 있는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매운탕 값을 추가로 더 받더라는 것이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생선 값과 밥값, 술값 외에 매운탕 값으로 1인당 5천원씩 3만 5천원을 더 받는 거야.""뭐라고? 매운탕 값을 1인당 5천원씩이나, 우리가 시켜먹은 생선뼈로 끓여준 매운탕인데, 말도 안 돼!"현지에 살고 있는 친구가 가당치 않다는 듯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들이 말릴 사이도 없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자기네 식당에선 당연히 매운탕 끓여주는 값을 1인당 5천원씩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 매운탕을 드실 것이냐고 묻지 않았느냐"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건 순 바가지다. 바가지 허허허' 모두들 허허 웃고 돌아섰다. 괜스레 미안해하는 귀향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서해 바닷가 풍경은 쌀쌀한 날씨 속에 정답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