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의 목을 벤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고간(高干) 도도(都刀). 백제군이 쳐들어와 옥천 관산성 일대에서 전투를 벌일 때 지원군으로 참가한 도도는 사화천 구진나루에 매복해 있다가 성왕의 목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 그는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의 휘하였다.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는 국가적 대공(大功)을 세운 무력은 지금의 차관급인 군주에서 뒷날 신라 최고의 벼슬인 각간에까지 오른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그는 금관가야 왕자 출신이라는 신분에 힘입은 바도 있겠지만, 554년의 관산성 전투를 보면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무난히 신라의 상류층에 진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관산성 싸움은 무력에게는 신라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는 기회가 되었고, 삼년산성의 도도에게는 무력의 총애를 받는 장수로 입지를 다지는 전투가 되었던 것이다.
나라 안에 남아 있는 성 중 가장 오랜 역사국가사적 235호인 삼년산성은 지금도 상당 부분 본래 모습이 남아 있어 찾아간 답사자에게 큰 기쁨을 준다. 쌓는 데 3년이나 걸렸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과연 튼튼한 정도가 다른 성들보다 한 수 위이다. 성벽 위에 서서 속리산 쪽으로 바라보며 즐기는 전망도 대단하다.
삼년산성은 보은읍 쪽에서 접근하는 길보다는 속리산에서 읍으로 내려오는 방향에서 다가서야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보은읍 쪽에서 오르면 근래에 복원된 성곽을 밟아보는 장점을 누릴 수 있지만 완만한 현대식 접근로를 걷는 데 멈추게 되는 반면, 고구려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높게 쌓은 북쪽 벼랑 아래로 다가가면 13m나 되는 높이가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성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다. 당연히 북쪽에서 접근해야 한다.
성(城)은 모름지기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아야 하는 역사유적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아서는 축성의 의의를 느낄 수 없다. 이는, 성을 쌓는 목적을 따져보면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성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방어를 위해 축조한다. 따라서 잘 지키려면 쳐들어오는 적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한다. 적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성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성 답사는 모름지기 공격하는 쪽에서 접근해야고구려 군사가 된 기분으로 삼년산성에 접근해 본다. 보은읍의 반대편에서 오정산(烏頂山)을 오르는 것이다. 새로 복원하여 축조된 보은읍쪽(서쪽) 성곽과는 달리 신라 시대의 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북쪽 성벽으로 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25번 국도변의 대야리에서 삼년산성을 쳐다보는 답사자의 마음은 그저 불편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이곳저곳의 성을 보아 왔지만, 지금처럼 사람의 마음이 가위 눌리는 듯 위축되는 경우는 처음이다.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능선 위의 회색 축조물이 삼년산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동행이 있다면, 그에게 한 번 물어볼 일이다. 산 위에 보이는 저게 뭘까? 그는 대답할 것이다. 감옥 건물이 어째서 산꼭대기에 있을까! 대야리 앞을 지나는 25번 국도에 올려다보면 그만큼 삼년산성은, 성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은 거대한 감옥이 산정에 웅크리고 있는 듯 느껴진다.
도로변에 붙어 있는 대야리 안으로 들어선다. 대야리를 지나면 길은 문득 좁아지고, 산 아래 들판을 지나는 농로 같은 분위기로 변한다. 그렇다고 걱정까지 할 것은 없다. 500m가량 들어가면 외딴 민박집이 나오고, 그 뒤로 삼년산성이 나무에 반쯤 가린 채 답사자를 내려보고 있다.
민박집 벽에 붙은 길로 들어서면 삼년산성 위로 오르기 쉬운 임도가 이어진다. 물론 삼국시대에는 그런 임도가 없었을 테니 그때의 병사들도 성곽 위로 올라서기가 쉬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길로 올라가 볼 것인가? 만약 어린 아이가 동행하고 있거나, 옷차림이 평상복에 구두를 신은 맵시라면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25번 국도 대야리 민박집에서 오르는 길이 최고하지만 등산복이나 운동복을 입었다면 좀 더 산성을 타고 오르는 체험다운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민박집에 닿기 100m가량 이전에 빈터가 있으니 그곳에 차를 세우고 신발끈을 동여매면 된다. 그곳은 삼년산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경할 수 있는 지점이다. 카메라를 든 답사자라면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곳에 멈춰 섰을 것이고, 그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그대로 산성을 향해 오른쪽 방향으로 돌진했을 것이다.
닦여진 등산로는 없다. 성벽은 가까이 있지만 길이 없어 어디로 접근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나무 위로 성벽이 보이는데도 마치 그림 속의 떡처럼만 여겨진다. 빽빽한 잡목과, 썩지 않은 채 첩첩으로 쌓인 낙엽들이 사람의 접근을 막는다. 더러는 가시덤불이 얼굴을 스치려 하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부여잡은 나뭇가지가 갑자기 툭 부러져 오히려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멈출 수도 없다. 낯선 길은 본래 내려가는 것이 위로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 성을 쌓으려고 신라의 군졸들은 3년의 세월을 보냈다. 혹시라도 무너지는 곳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차곡차곡 쌓은 돌들 중 일부에는 이름까지 새겼다. 그런 역사를 다 알면서 어찌 이 정도도 못 올라 중도에 그만둘 것인가. 비록 성벽을 다시 쌓지는 못할지라도 반드시 성벽 바로 아래까지는 가보아야 한다.
이 성벽 오르려다 죽은 군사 부지기수
아마 김유신도 이 길을 걸어서 성벽으로 올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적군의 입장에 서서 삼년산성을 공격할 방도를 궁리해보았을 터이고, 으레 이 오르막길로 산성에 접근해보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무력의 무용담은 김유신 일가의 큰 자랑이 되었을 것이니, 선조의 막강한 위업이 남아있는 이 산성에서 그는 앞날의 큰 뜻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으리라.
평이한 길이면 10분에 닿을 것을 거의 30분 가까이 걸려 성벽에 닿았다. 여기가 가장 높은 지점인지, 까마득한 하늘까지 성벽의 돌들이 쌓여 있다. 성벽 위에는 나무 한 그루 없고, 파랗게 빛나는 하늘만 걸려 있다. 지금껏 본 다른 어느 성보다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광경이 생생하게 실감으로 다가오는 곳, 바로 삼년산성이다. 하지만 영화나 텔레비전에 본 그 군사들은 대부분 떨어져 죽었다.
13m의 성벽을 지금, 맨손으로 타고 오를 수는 없다. 등을 기대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이 성벽은 무섭다. 그런 지경인데 어찌 기어오를 마음을 먹을 수 있으라. 위에서 불화살을 날리거나 돌을 굴리는 공격이 없는데도 저절로 오금이 저려온다.
옛날에는 어땠을까. 아마 삼국시대라면 이 성벽은 13m 수준도 아니다. 이리로 접근하려고 출발을 했던 공터가 오르막의 시초이니, 삼년산성을 공격하려면 거기서부터 위를 쳐다보며 다가와야 한다. 고층빌딩이 흔한 현대인의 눈에도 도로변에서 보는 삼년산성은 마치 감옥 건물처럼 보였는데, 고구려 군사의 마음에야 얼마나 겁나게 보였을까.
1550년 된 신라의 돌들을 만져보며아래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또 조심'을 되뇌면서 연거푸 성벽 사진을 찍는다. 거리는 너무 가깝고 성벽은 너무 높아 실경(實景)이 제대로 잡히지를 않는다. 성벽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성벽을 찍는다. 그림이 좋다. 이래서 고달픈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걸었을 길을 그대로 고이 밟아보는 사람은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으니, 그것을 만든 옛 사람들의 생각도 짚어볼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사진도 남길 수 있다. 이 익숙한 진리를, 삼년산성 성벽 아래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채 새삼 깨닫는다.
성벽 아래에 무너져 쌓인 돌들과 그 위에 얹힌 흙을 밟으며 천천히 동쪽으로 걷는다. 아래로 구를까 싶어 신경이 쓰인 탓이기도 하지만, 삼국시대 성벽의 돌이 뿜어내는 촉감이 손끝에 짜릿짜릿하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 번쩍이며 흩어진 번개의 섬광이 눈동자 안으로 달려드는 것만 같다. 470년(자비왕 13)에 지어진 삼년산성! 지금 손으로 만져보는 이 돌들은 이곳에서 1550년의 세월을 보낸 것들이다.
삼년산성은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성이라고 한다. 쌓는 데 3년이나 걸렸다고 하여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만 보아도 짐작이 되는 일이지만, 납작한 판돌을 한 켜는 가로로, 다음 한 켜는 세로로 놓아 井(정)자처럼 엇물리게 쌓았기 때문에 기초가 매우 단단하고 충격에 완강히 버티는 힘을 가진 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3년 내로 무너지는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쌓은 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여 곳곳의 판돌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할 것인가. 삼년산성은, 한강을 건너는 대교가 내려앉고, 백화점이 땅속으로 꺼지는 현대의 부실공사와 꼭 견주어볼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다.
성벽 아래를 타고 가는 길은 점점 좁아지고 오르막이 되더니 이윽고 답사자를 성벽 위에 올려놓는다. 아, 바람 한 점 없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덕분인지 가슴속이 다 시원하다. 복원한 서쪽 성곽 너머로 멀리 바라보이는 보은읍 방향의 풍경은 산성과 시가지 사이가 온전히 들판인 까닭에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말끔하고, 동쪽에서 남쪽으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속리산 방향의 푸른 산하는 어쩌면 신기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보은산성이 축조된 이 오정산은 높이가 불과 해발 350m밖에 안 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온 사방이 하나같이 아래로 보이는 것일까.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의 이름 새겨져 있어지금껏 남아 있는 우리나라 성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삼년산성, 성왕을 벤 도도에 힘입어 온갖 삼국 관련 글에 등장하고 있지만, 660년 9월 28일에도 큰 행사가 벌어졌다. 의자왕이 항복을 한 7월 13일로부터 두 달 반이 된 그 날, 당나라 사신 왕문도가 서해를 건너왔고, 김춘추는 그를 삼년산성에서 접견하였다. 무열왕은 왜 당나라 사신을 삼년산성으로 불렀을까? 그만큼 삼년산성은 당나라 사신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성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