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린다. 1883년 크레타 이라클이온에서 태어난 그는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사건과 독립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유에 대한 갈망 외에도 그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은 여행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카잔차키스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갔다."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라고 말했다. 그는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등,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도출'하려고 했다. 육체와 영혼은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새로운 여행을 하였다.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두 인물의 만남. <그리스인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났던(실제로 조르바와 함께 탄광 사업을 했던 적이 있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쾌하고 농탕한 조르바라는 인물의 기행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책을 다 읽고 선명하게 남은 것은 독특하고 상반된 두 인물의 개성이다. 펜 운전사인 나(필시 카잔차키스 자신)와 생의 신비를 사느라 펜이나 책 같은 것은 잡을 수 없는 조르바. 조르바라는 인물은 매사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아침 매 순간마다 그가 보는 것들이 새롭고 경이롭다. 모든 사물을 보고 놀라고 묻는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은 기적이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고 경탄하는 수준은 가히 경이롭다.
어린 아이였을 적에 우리가 갖고 있던 호기심과 신선한 감동, 그것은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보석이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디어지고 타성에 젖고 둔해졌다. 조르바의 그 경탄할 만한 호기심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어디선가 잃어버린 그 무엇(호기심)을 찾아 문득 두리번거리며 찾게 만든다. 조르바는 또 산투르를 치고 춤춘다. '주름투성이에 벌레 먹은 나무처럼 풍상에 찌든 조르바. 그에게 있어 인간의 의미는 곧 자유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으며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그렇게 감탄하는가 하면, 그가 일을 손에 한 번 잡으면 미친 듯이 건드리면 몸이 부러질 것처럼 집중한다.(331p) "나는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가 잔뜩 긴장하여 이게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르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두목이 갑자기 내 몸을 건드리거나 말을 걸면 돌아봐야죠? 그럼 꼭 부러져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p164)한편 주인공 '나'(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전혀 다른 인물. 조르바가 행동가라면 '나'는 사색가다. 조르바가 산투르 악기와 춤과 짧은 몇 마디의 언어로 표현하고 삶으로 말한다면 '나'는 펜대 운전사로 살며 책을 읽고 사색하고 '전쟁처럼' 글을 쓴다. 조르바가 실제로 땀 흘리며 오롯이 집중하고 몰입해서 갈탄광에서 광맥을 캐며 일한다면 '나'는 내 안에 있는 '염소'가 더 이상 종이가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지식에, 책을 탐하며 몰입하고 탄광 캐듯 사색의 탄광을 깊이 판다. 쓰고 또 쓴다. 전쟁처럼, 무자비하 추격전이요 포위공격과 같고 마법의 주문처럼 쓰고 또 쓴다.
조르바처럼 살지 못하고 책에 숨고 글에 숨어 살던 그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싫어지고 환멸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결국 인간이란 제각기 제 멋에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르바의 말처럼 사람은 '나무와 같다.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무화과나무와 싸울 수 없듯이 자기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사색가로 행동가로 똑같은 비율로 균등하게 살 순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은 음식으로 무슨 일인가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정신의 거대한 갱도 속으로' 들어가든지 실제 광산의 갱도 속으로 들어가든지.
조르바는 비유하자면 갈탄광을, '나'는 정신의 탄광을 사는 것이다. 조르바는 '살과 피'로 살고 '나'는 펜과 잉크와 책과 사색으로 산다. '나'는 조르바라는 인물과 그의 기행에 가까운 삶과 생생한 그 인물에 반해 자신의 정체성의 혼돈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조르바라는 한 인물과 친구가 되어 대리만족을 느끼며 여전히 그는 조르바와도 그의 친구와도 다름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한다. '나'는 조르바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속에 든 염소란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 먹어야 성이 차겠대요...당신이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입니다."
조르바의 말대로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모른다. 주인공 '나'는 여행길에 조르바를 만나 그가 살지 못하는 다른 삶을 보며 생생한 간접체험을 한다. 조르바는 사물을 처음 보듯 경이와 놀라움으로 대하는 사람, 일할 땐 일이 되고 춤을 출 땐 춤이 되고, 산투르를 연주할 땐 산투르가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여행길에도 놓지 못하고 넣어갔던 책과 원고뭉치. 조르바가 땀 흘리며 오롯이 집중하고 탄광이 되고 갈탄광과 하나가 되듯 일하듯 정신의 갱도 깊숙이 들어간다. 광산을 애벌레가 '나비'로 부화되고 숙성되도록 내 버려둬야 스스로 나비가 되어 힘찬 날개 짓으로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르듯이, 그는 조르바와 함께 여행하면서, 아니 조르바를 여행하면서 결국은 그가 품었던 '씨앗'이 속에서 태동하고 부화되고 자라서 한 순간에 조르바 연대기를 완성하였다.
조르바는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줄 수 있다"(p100)고 말했다.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를 쓰고,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면서. 책은 강렬한 흡인력으로 책은 나를 잡아끌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식대로 말한다면 세상에는 인생의 신비를 사느라 시간이 없는 사람과 펜대를 운전하는 사람,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살면서 먹은 음식으로 똥을 사람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도 펜대를 운전하는 사람도 자신의 '갱도'를 파는 사람들이다. 자기세계가 확고한 사람이다. 돋보기로 태양광선을 한곳에다 집중시키면 불이 붙듯이, 태양열이 분산되지 않고 바로 그 지점에만 모여서 불이 붙듯이.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 살아가는 사람들이 편만해 있다.
산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꿈에 대해 온전한 몰입 속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 조르바가 산투르를 치려면 거기에만 몰입했던 것처럼, 그가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것이 돌이 되고 석탄이 되고 산투르가 되듯이, 사물을 바라보면 생애처럼 보는 듯 기적처럼 감탄하듯이. '나'가 정신의 거대한 갱도 속으로 들어가듯이, 오직 한 가지에만 몰두 하듯이. 돋보기로 태양광선을 한 곳에다 집중시켜서 불이 붙게 하듯이, 책으로 책을 정복했듯이. 사람이 제각기 다르듯 무화과나무에서 버찌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다투지 않듯이.
덧붙이는 글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씀,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 2008년 3월, 484쪽, 1만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