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년차 주부 김영미씨(가명, 40)는 알뜰한 돈 관리를 위해 3년 전부터 지금껏 꾸준히 가계부를 써오고 있다. 덕분에 대략 어디에 얼마 정도를 쓰는지 감을 잡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매월 '생활비'로 평균 얼마가 들어가는지, 아이들에게 한 달 평균 얼마의 돈을 쓰는지, 양가 부모님께는 어느 정도의 규모로 돈이 지출되고 있는지 등 돈이 쓰이는 패턴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매일매일 지출이 발생할 때마다 가계부에 적으면서 쓸데없이 돈 쓰면 반성하기도 하죠. 주말이 되면 주간 결산을 하고, 월말에 총계를 내요. 그런데 매월 가계부를 써도 적자는 마찬가지예요. 월간 결산을 통해 고작 확인하는 건 매월 수입보다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뿐이라 답답하죠. 어딜 어떻게 줄여야 하나 막연하기만 해요."벌써 3개월째 지출 결산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다. 한번 붙들고 하면 꼬박 3~4시간 이상이 걸리는 지출 결산이라 쉽게 엄두가 나지 않은 채로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 버렸다.
"가계부가 단순히 쓰는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썼으면 통계를 내봐야 하는 거죠. 그런데 쓰다 보니까 이래저래 참 문제가 많아요. 자동 이체로 빠져나가는 것도 있고, 이번 달에 썼지만,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은 담 달에 빠져나가서 언제 시점으로 기입 해야 하는지도 헛갈릴 때가 잦아요. 명절 연휴 기간이나 휴가기간 같은 때 정신없어 기록하지 못하면 한 달 적은 것이 통째로 무의미해지기도 하고요. 그날그날 적지 않아 생각나지 않는 지출도 많고…. 그냥 이번 달 얼마 썼나만 대충 주르룩 더해서 총액만 확인해요. 때론 카드명세서가 있으니까 기록하지 않고 그냥 지출 내역 확인만 하기도 하고요. 각 지출항목별로 예산을 세워봤지만, 예산만큼 썼는지를 나중에 통계를 내보려고 하니 계산도 틀리고 복잡하고…. 어휴 너무 힘들어요."그렇다면 대체 왜 가계부를 쓰는 것일까. 한 달 동안 얼마 썼나 확인하려고? 매번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 금액을 확인하는 것이 화도 나고 지쳐서 영미씨는 이제 가계부 쓴다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다. 우리 집이 어디에 얼마 쓰고 사는지 파악하려면 지출항목별로 통계를 내봐야 하는데 날짜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지출항목을 찾아가며 통계를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분류되어야 하는 지출 계정이 수시로 헛갈린다. 은행수수료는 어느 계정으로 넣어야 할까.
지난번 점심 때 친구가 돈 없다고 해서 대신 내준 밥값은 생활비인가, 용돈인가, 접대비인가, 시누이가 급하다고 빌려 간 돈은 지출인가. 지출이라면 어느 계정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구두 뒷굽 수선하는 건 어느 지출 항목일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으로 시간은 자정을 향해 흐르건만 영미씨의 가계부 통계는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통계 내기 위해 쓰지만, 통계 내기 어려운 가계부매일매일 얼마를 어디에 썼는지를 기록하는 일은 돈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완전한 두뇌와 제멋대로의 마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확대 기억하고 기타 중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쉽게 잊어버린다. 이는 우리가 어떤 기준 틀을 두고 필요한 재화를 신중하게 소비하기보다 그저 습관적으로 순간의 즉흥적 소비를 할 때가 잦다는 걸 뜻한다. 습관적이고 즉흥적 소비는 '후회'를 부른다. '후회'할 것 같으면 돈을 쓰지 말든가, 돈을 썼을 것 같으면 '후회'를 말든가. 가장 손해나는 건 돈을 쓰고도 후회하는 상황이다. 기록해두고 되짚어 보면 다음번 후회를 피해 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극히 소박한 생활을 지향한 <월든>의 저자 데이빗 헨리 소로우, 검약의 대명사 니어링 부부도 입을 모아 회계장부의 중요성을 우선 이야기했다.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던 그들은 이미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들임에도 왜 그렇게 열심히 회계장부를 썼을까. 회계장부를 제대로 기입하는 것이야말로 절약을 넘어서서 한정된 재화의 바람직한 공유 방식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카 쉐어링' 같은 경우, 소유가 아니라 공유로 더불어 활용하기 위해 '차계부'를 잘 관리하는 것은 필수다. 이 집 저 집 차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 발생하는 오염이나 중복 비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나, 각자 주행거리만큼 표시하고 사용한 만큼 비용을 감당하고 세금이나 보험료같이 공동 비용을 잘 배분해서 충당하는 등의 '회계장부'에 근거한 시스템이 없다면 '합리적 공유'는 분쟁의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화폐는 공공재다. 누구의 소유로 어느 한 곳에 고이는 순간 경제순환구조는 마비되게 마련이다. 화폐가 여러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거치며 원활하게 돌아야만 경제는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욕망과 망상이 가끔 그릇된 자원배분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 '회계장부상의 정확한 숫자'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스스로 부족한 자신의 견제 도구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도울 수 있다.
지난 IMF 사태 때도 겪었듯 재산의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돈이 막히는 '돈맥경화'만으로도 극단적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집이 10억이든 20억이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현금이 없다면 결코 온전히 재산이라 할 수 없듯 말이다. 결국, 재산은 없지 않은데 돈이 부족한 이유는 회계장부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인데, 고가의 부동산을 유지만 하고 있어도 여기 맞물려 큰 비용이 발생되고 있음을 안다면 결국 허황한 자산축적의 망상에서 벗어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적정 규모의 부동산을 고민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합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살림'을 하려면 회계장부는 필수불가결하다. '나'와 '너'를 넘어선 '우리'를 경영해야 하기 때문에 공동의 의사결정을 위한 토대가 되는 회계장부가 기준이 되면 좋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했던 가정이라는 환경을 지속 가능한 생태적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부터 나의 기여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가정의 보호와 양육을 받다가 기여를 하게 되는 시점을 진정한 '경제적 자립'의 시점으로 본다.
자꾸만 돈 들어갈 일이 생긴다며 가족사에 넌더리를 낼 일이 아니라, 얼마 정도가 들어가게 마련인지부터 스스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상담 과정에서 양가 가족들에게 쓰이는 돈의 규모가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데서 놀라곤 한다. 각종 가족 경조사에 대처할 때도 전체 예산 규모를 알고 부부가 상의하여 지출액을 결정한다면 이유 없는 감정싸움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많이 내놓고 싶어 하는 남편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허세라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사전에 우리 부부 수준에서 지급될 수 있는 금액의 현실적 타진이 필요한 것이다.
어디에 얼마만큼을 쓰고 있는지 구체적 기록을 통해 생활 규모를 파악해야만 현재 쓸 돈을 남겨두고 나머지 돈으로 저축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현재를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 준비란 있을 수 없다. 무작정 얼마 뚝 떼어 저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래 봐야 중도에 저축 깰 일만 생길 뿐이다. 현재의 생활 규모를 파악해야 적정 수준의 생활비 예산을 알게 되고, 이를 기준점으로 잡아서 '많이 썼다' 혹은 '적게 썼다'를 판가름할 수 있다. 아무런 기준점도 없이 무조건 아끼기만 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도 이롭지 않을뿐더러 실제로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수준에 이를 수도 없다.
이처럼 회계장부 본연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종전의 가계부 양식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돈은 쓰고 살자고 버는건데 지출 자체를 반성하게 하는 결산 중심의 가계부는 이제 그만두자. 그리고 의미 있는 우리 가정만의 통계를 낼 수 있는 적절한 회계장부의 양식을 고민해보자.
우리 가정의 적정 생활비의 기준부터 잡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기준점을 토대로 우리 가정의 '적정 소비 예산'을 수립한다. 이 소비 예산을 정하는 방식은 내 맘대로다. 즉 소비 계정을 세분화하고 정교화하는데 헛된 노력을 기울이지 말란 뜻이다.
우선 매달 일정한 날짜에 빠져나가게 마련인 보험료나 공과금, 관리비 등의 '고정지출'은 일 년 치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그렇다면 고정지출에 대해서는 특별히 일일이 가계부를 쓸 필요가 없다.
고정지출을 제외한 나머지 지출에 대해 영미씨는 지출항목을 아래와 같이 통합시켜 관리하기로 했다. 갈갈이 세부 항목으로 쪼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출항목별로 4가지 정도로만 대분류하고 해당 예산을 정했다. 예산을 수립한 후 매일매일 날짜별로 가계부를 쓰지 않고, 아래와 같이 지출항목별로 정해진 예산을 차감해 나가며 기재하기 시작했다. 지출항목별 결산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다.
항목별로 예산을 세우고 나서 날짜 별로 기록하지 않고 지출항목 아래에 써 가면서 예산에서 사용금액을 차감해나가고 나니 항목별로 흑자 적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해진 내에서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막연히 아껴야 한다는 스트레스만 컸던 것 같아요. 지금은 구체적으로 얼마를 쓸 수 있는지를 알고 지출하니까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데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리고 어차피 예산 내에서 돈 쓰는 거니까 아껴야 한다는 것보다 같은 돈으로 어떻게 쓰는 게 더 내가 좋아하는 쪽으로 소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정해진 예산만큼 소비하는지를 점검하는 회계장부 쓰기로 적정 소비지출금액을 스스로 정하고 마이너스를 줄여갈 수 있었던 영미씨는 이제서야 비로소 적금과 연금 납부를 시작했다. 모으기가 무섭게 깨서 쓸 일이 생겨 '적금 징크스'까지 느끼던 그녀였지만 이제 어느 정도의 규모로 파악된 '소비 예산' 속에서 규모 있게 지출하는 습관을 갖게 됨으로써 안정적으로 저축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회계장부를 쓰는 일은 더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돈을 쓰고 살아야 하는 동안엔 의무적으로 나를 통해 쓰인 재화의 기록 장부를 남겨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스타일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말고 그저 나를 통해 얼마의 돈이 어디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파악하는데 우선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파악이 우선이다. 절약하고 말고는 그다음 문제다.
이처럼 생활경제상담센터 '푸른살림'에서는 가계부를 넘어선 아주 특별한 돈 관리 방식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박미정 시민기자는 현재 (사)여성의일과미래 생활경제상담센터 ‘푸른살림’에서 참경제교육과 생활경제상담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