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를 때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는 것은 독서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방법 중 하나다. 작가가 살아온 인생 내력이 책의 내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변신>으로 유명한 체코 출신의 유대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유태교 신자가 아니었던 그는 체코인들 사이에서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독일인 취급을,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유태인 취급을,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이교도 취급을 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카프카가 일생동안 느낄 수밖에 없었던 소외감은 그가 쓴 모든 작품의 주제에서 주요한 정서로 쓰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쓴 대부분의 책에서도 일정한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들 속에서 진실을 찾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기자 특유의 작업 성격이 반영된 '냉철하다', '날카롭다', '예리하다', '불편하다' 등의 형용사가 그것이다. 구체적인 현장의 풍경들과 동시대 실존인물들의 뒷얘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KBS 방송기자인 박에스더가 지은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쌤앤파커스 펴냄) 역시 읽다 보면 천상 기자가 쓴 책이라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박에스더는 이 책에서 자신이 한국에서 살아온 사십 평생 동안 겪었던 권위주의와 집단주의, 합리성의 부재, 차별 등의 사회적인 '고질병'에 대해 거침없는 필체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여자 기자'가 쓴 획일적인 한국 사회 비판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작가의 이력은 크게 두 가지. '기자'와 '여자'다. 저자인 박에스더는 KBS 최초의 법조 출입 여자 기자였으며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는 파키스탄에서 종군취재를 했다. 2004년에는 KBS 라디오에서 <라디오 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를 진행하며 정·관계, 재계, 학계의 거물급 인사들에게 예리한 질문을 거침없이 날리는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한 마디로 기자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유능한 기자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자다. 이 사회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차별과 억압이 아직 남아있고 그녀 역시 책에서 그런 경험들을 주요하게 토로한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해 한국 사회의 '대표적 약자'인 여성의 신분으로 느낄 수 있는 남성 위주의 획일적인 문화와 '나'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문화에 대한 심정을 기자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논리로 담아냈다. 시종일관 한국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찌르는 이 책의 내용이 감정과 이성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매끄러운 호응을 이루며 다양한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다.
저자 박에스더는 "이 책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며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팔순 노인까지 한국 사회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다 경험하고 느꼈을 이야기를 하려 한다"고 말한다. 굳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한국 특유의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집단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차이'와 '다양성' 인정하는 것에서 변화 시작돼"사실 박에스더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려는 바는 간명하다.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로 단일한 잣대 속에 짓눌려있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지만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하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터부들을 촘촘하게 건드린다.
그녀는 '우리'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우리에게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하나가 되자'고 외쳐온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단일'하다"며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브랜드의 점퍼를 입고 다니며, 최고의 신랑감이나 최고의 신붓감 직업은 왜 그리 단일한가"하는 의문을 던진다.
"이제 단일한 잣대 속에 짓눌려 있던 다양성을 살려내야 한다. 생김새의 차이, 재능의 차이, 생각의 차이, 취향의 차아... 그 각각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문화. 물론 '차이'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뭘 다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뭘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박에스더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자유주의가 필요하다"며 "세상의 가치는 누군가 한 사람이 결론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누군가 그것을 인정하는 모양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획일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얘기다.
그녀는 책 말미에 다양성을 갖춘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할 일들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기회의 균등을 실현하기 위해 학벌을 철폐하자고 주장하기, 조직 부적응자로서 선배에게는 계속 싸가지 없는 후배로, 싸가지 없는 후배에게는 '꼰대' 대신 '일하는 할매'로 남기, 성적 소수자를 이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기 등이다. 그녀가 책을 통해 밝혔다시피 조금 불편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 책을 읽고 일상에서 분투하는, 분투할 이들의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 박에스더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