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구조라마을 언덕바꿈공원.
낙엽을 다 떨어뜨린 고목 한 그루,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만 겨우 달고 있는 고추나무.
휑하니 불어대는 샛바람은 언덕배기를 오른 나에게 쓸쓸함만을 안겨 준다.
그런데, 저쪽 한 모퉁이에 빨간 우체통 하나가 서 있다.
몸짓이 작은 우체통은, 예전 마을 골목 어귀에서 봐 왔던, 몸통을 땅바닥에 쫙 붙이고 서 있던 우체통과는 다른 모양이다.
옆으로는 빈 의자가 동무한 채 앉아 있다.
황량한 풍경과는 달리 정감 있는 모습이요, 옛 추억을 떠올려준다.
군 복무 시절.
편지는 그야말로 꿈이요, 희망이었다.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게 해 주는 청량제였기도 하다.
저녁 휴식시간.
편지를 전달하는 선임하사의 눈과 입으로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드디어 계급과 이름을 부른다.
"김○○ 이병, 박○○ 병장, 이○○ 일병, 권○○ 하사…."다음에는 내 이름을 부르겠지.
그런데 선임하사 손에 쥔 편지 꾸러미는 시간이 갈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끝내 오늘도 나의 편지가 없음을 깨우쳐 주면서, 희망했던 그 짧은 시간을 무참히 쪼개 놓고 만다.
30년 전 편지를 꺼내봅니다
1981년 6월 어느 날.
서울 잠원국교(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으로부터 위문편지를 받았다.
당시는 학교에서 반 강제로 위문편지를 쓰게 하던 때였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국군장병 아저씨께'라는 서두로 위문편지를 써본 적이 있다.
그리고 어릴 적 나와 비슷한 아이로부터 위문편지를 받을 줄이야.
군 복무를 마치고 30년을 훌쩍 넘긴 3월 12일.
고이 간직한 그 위문편지를 앨범에서 찾았다.
조금 탈색한 봉투에 담긴 편지를 꺼내 읽어보니, 옛 군 생활이 온 머리를 헤집어 놓는다.
고생, 고통, 인내, 담력, 담배, 유격훈련, 행군, 구보, 초코파이, PX, PRI(피알아이·사격예비훈련의 약칭), 외박, 외출, 휴가, 부족한 잠 그리고 야간 근무 등 수없이 많은 기억의 파편들.
구조라 언덕바꿈공원에 있는 빨간 우체통이 옛 추억을 떠올려 놓게 할 줄이야.
편지와 관련한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이 있으면, 이곳을 찾아 가 보는 것도 좋으리라.
아름다운 풍경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기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거제지역신문인 <거제타임즈>, <뉴스앤거제> 그리고 제 블로그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