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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는 학교폭력의 원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주호민 작가의 피켓.
'만화는 학교폭력의 원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주호민 작가의 피켓. ⓒ 이보람

"만만한 게 만화예요. 학교폭력의 원인을 찾으려는 것 같은데, 문제만 생기면 만화 탓, 게임 탓을 해요. <전설의 주먹>은 정부에서 상까지 받았는데, 유해매체 심의대상에 올라 있어요. 정확한 기준 없이 빨간 딱지를 붙이는 거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웹툰(인터넷 만화) 심의에 만화가들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지난 2월 방심위에서 청소년 폭력의 원인으로 23개 웹툰을 지목하고, 이들 만화의 폭력성과 관련해 유해매체 심의대상으로 삼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내용을 작가들에게 통지했다. 만화계는 방심위 심의가 만화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며, 학교 폭력의 원인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 등 만화 단체 10여 개가 참가한 '방심위 심의 반대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의 결정에 따라 지난 12일  김수용(힙합) 작가를 시작으로 이종규(전설의 주먹: 글), 이윤균(전설의 주먹: 그림) 작가가 목동 방심위 건물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이어왔다.

기자가 찾아간 15일에는 비대위원장인 윤태호(이끼)작가와 강풀(순정만화), 주호민(신과 함께) 작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쟁쟁한 웹툰 작가 3명이 동시에 출동했다. 비대위는 방심위의 23개 웹툰 청소년 유해매체 선정이 다음 주 정기회의에서 결정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세 '시위대'가 동시에 '1인시위'를 벌인 것.

 15일 오후 목동 방심위 앞에서 만화가들이 웹툰 심의 반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주호민, 윤태호, 강풀 작가.
15일 오후 목동 방심위 앞에서 만화가들이 웹툰 심의 반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주호민, 윤태호, 강풀 작가. ⓒ 이보람

이들 세 작가는 이날 오후 6시부터 7시까지 방심위 건물 앞에서 20m씩 거리를 두고 각각 '1인시위'를 했다. 이런 웃지 못할 시위 형태는 진보진영이 악법으로 지목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 '1인시위'는 신고대상이 아니고 2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은 동일 장소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들고 선 피켓에는 방심위 심의에 반대하는 구호 외에도 작가들이 직접 그린 친근한 만화들이 눈에 띄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시위에서 지나가던 시민 중 일부는 작가들 얼굴을 알아보고 멈춰서 이야기를 듣거나 함께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만화 팬들이 작가를 만나 응원할 수 있는 날짜는 19일 유리아, 20일 억수씨, 21일 안단테, 22일 연제원·황준호·강냉이, 23일 권혁주·노마비, 26일 유동혁, 27일 박세준, 28일 주동근, 29일 혜진양이다.

방심위 앞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어서 15일에도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다. 만화가들만이 외로운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기성 언론을 상대로 한 공식 기자회견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자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묻는 말에 친절하게 답했다.

  웹툰 심의에 반대하는 강풀 작가가 기자에게 준 메시지.
웹툰 심의에 반대하는 강풀 작가가 기자에게 준 메시지. ⓒ 이보람

- 펜을 내려놓고 '1인시위'에 나선 만화가들 모습이 익숙해 보이지는 않은데요.
윤태호(이하 윤) : "우리도 어색해요. 작가들이란 기본적으로 방에서 원고지랑 연애하는 사람이거든요. 내향적인 사람들이 많아요. 요즘은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지만, 아직까지 이런 데 나와서 시위하는 거 우리도 어색하고 힘들어요. 지금도 밤샘 작업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어요. 청소년 문제가 생겼다 하면 비난의 화살이 만화 쪽으로 와요. 이때 아니면 언제 우리가 이런 분명한 액션을 취할 수 있을까 해서 용기를 냈습니다. 나도 부모인데 만화가가 이런 평가를 받는 직업이라는 게 수치스럽기도 하고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 최근 학교 폭력 문제가 불거진 이후 방심위가 웹툰 심의에 나섰습니다. 시기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윤 : 학교 폭력의 원인으로 일부 웹툰을 지목하고 있는데 문제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만화와 학교 폭력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전문적인 연구나 자료를 제시하지도 않고…… 설사 어린 학생들이 '만화나 게임을 보고 따라 했어요'라고 말하더라도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지, 이런 식은 말도 안 되죠. 폭력적인 장면이 있는 작품에는 우리 스스로 19금 장치를 걸었는데 이걸 다시 유해매체로 선정하는 식의 이번 방통위 태도에 많은 작가들이 분노하고 있어요."

주호민(이하 주) : "방심위 말로는 폭력성 위주로 선정했다는데 만화업계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전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전설의 주먹>은 내용이 폭력의 역사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내용인데 그 맥락에서 보지 않고, 폭력장면만 따다가 유해하다고 하는 거죠. 작품 전체를 놓고 봐야지 일부분을 따로 떼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학교폭력의 근본원인은 정작 입시위주 교육이 아닌가요. 학생들의 억눌림 같은 것들이 왕따나 폭력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요. 만화나 게임 같은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폭력이 발생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웹툰 <열혈초등학교>는 폭력성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주 : "<열혈초등학교>에 폭력적인 장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근데 <열혈초등학교>는 장르상 일종의 부조리극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은 모두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어요. 등장하는 '초딩'들은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불합리한 구조를 드러내고, 웃음으로 무력화하는 역할을 하구요. 그래서 <열혈초등학교>를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로 보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수위는 업계에서 19금으로 조절해 연재하면 되는데 방심위 쪽에서 일방적으로 연재를 중단하라고 통보했어요."

  방심위로부터 청소년 유해매체 선정을 통보받은 만화가 '귀귀'의 <열혈초등학교>는 183회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됐다.
방심위로부터 청소년 유해매체 선정을 통보받은 만화가 '귀귀'의 <열혈초등학교>는 183회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됐다. ⓒ '귀귀' 블로그 화면 캡처
-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면 어떤 타격이 있나요?
주 : "지난 1997년 청소년보호법 시행으로 만화 출판계가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이번에도 비슷할 것 같은데요. 일단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면 홍보가 어려워집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접촉할 수 있는 곳에서 홍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서점 판매대에도 진열할 수 없고요. 온라인상으로는 유해매체로 지정되면 웹툰에 '19' 표시가 되고, 웹툰을 보기 위해서는 실명 성인 인증을 해야 하는 불편이 따릅니다."

강풀(이하 강) : "더 위험한 것은 작가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는 거죠. 만화를 그릴 때 이런 건 검열에 걸리지 않을까, 유해매체로 지정되지 않을까, 검열하게 될 거예요. 표현 자체가 굉장히 위축될 거라 생각해요. 만화가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상황에서 재미있는 만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또 작품성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고. 크게 보면 우리 만화 자체의 경쟁력이 굉장히 약해질 것 같습니다."  

윤 : "청소년 유해매체라는 용어 자체도 고쳐야 해요. 만화가 술, 담배도 아니고. 얼마든지 좋은 용어도 많은데 왜 해로운 것으로 딱지 붙이는지 모르겠어요. 만화가 해로운 건 아니잖아요.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이런 것을 바로잡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릴레이 시위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요?
윤 : "기본적으로 만화의 자율심의가 존중받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방심위의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을 철회해야 합니다. 나아가 청소년보호법 개정과 만화의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우리 목적인데요. 이번이 심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만화 전문가의 의견이 반영돼야겠죠. 저희 쪽은 만화계의 자정작용을 통해 자율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을 원하지만, 사회적인 합의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자정작용이라면?
윤 : "온라인 공간은 기본적으로 쌍방향성을 갖는데요. 그 안에서 만화를 그리면 독자들의 반응, 댓글 같은 것이 바로 눈에 보여요. 결국 작가가 독자에 반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연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만화계에서는 비전문가의 규제에 앞서 작가인 우리가 독자들과 직접 호흡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거예요. 방심위가 일방적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만화계 내부의 자율적 등급제가 적용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한데요.
윤 : "일단 릴레이 시위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 3월까지 참여할 작가들은 이미 정해졌고, 4월 이후에 할 작가들도 섭외중에 있습니다. 또 조만간 방심위 심의결과에 따라 법적인 저항도 구상하고 있고요. 학계와 함께 방심위측에서 안 하고 있는 자료조사도 할 생각이에요. 과연 작가들의 창작물이 일반대중과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해외사례도 조사해 백서를 만들 계획입니다. 우리의 작품은 현 시대의 반영이지, 시대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겁니다."

  '노컷 운동' 공식블로그에서 릴레이 시위 현황(상단)과 독자들이 보낸 노컷툰(하단)을 확인할 수 있다.
'노컷 운동' 공식블로그에서 릴레이 시위 현황(상단)과 독자들이 보낸 노컷툰(하단)을 확인할 수 있다. ⓒ 공식 블로그 화면 캡처
- 만화가답게 발랄한 방법으로 시위할 계획은 없나요?
강 : "'1인시위' 자체가 만화가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방법이에요. 방에서 조용히 만화 그리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다른 집회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지만 '1인시위'는 처음입니다. 온라인에서는 이미 '노컷운동'으로 불리는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어요. 공식 블로그에서 진행중이며 방통심의위 조처를 비꼬는 웹툰 작가들의 작품도 올라와 있습니다. 가장 만화가다운 방법이라 생각해요. 점차 다양한 방법이 나올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위가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후 7시를 넘어서면서 시위현장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피켓을 정리하고 돌아서는 강풀 작가에게 겸연쩍지만 사인을 부탁했다. 우람한 체구의 그가 펜을 쥐고 쓱싹, 금세 귀여운 그림이 완성됐다. 매체 이름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림에 촉촉히 내리는 '단비'도 그려 넣었다. 그는 "말하는 사람은 말로, 글 쓰는 사람은 글로, 만화 그리는 사람은 만화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잠시나마 펜을 쥐고 본업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웹툰심의 시위#방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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