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예보를 믿고 계획했던 일을 다음으로 미뤘는데, 예보가 맞지 않았을 때의 허탈감이란. 지난 주말(17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중요한 약속을 포기하고 모처럼 집에서 쉬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허탈감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을 수만 없어, 가까운 산에 오르기로 했다.
거제도엔 11대 명산이 있다. 최고봉인 가라산(585m)을 시작으로, 계룡산(566m), 노자산(565m), 옥녀봉(554.7m), 앵산(507.4m), 산방산(507.2m), 선자산(507m), 북병산(465.4m), 국사봉(464m), 대금산(437.5m) 그리고 망산(397m) 등.
이날 산행은 여덟번째 높이로, 북쪽으로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북병산이 목적지. 거제시 동부면 망치고개를 경계로, 삼거리에 주맥을 내려 뻗어 문동과 옥녀봉 줄기와 연결돼 있다.
이 산에는 옛 신라시대 엄적사와 법률사란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법률사는 그 경내가 방대하여 장승포 아주리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며, 그 절의 3층석탑비가 지금 대우조선소 내에 남아 있다.
거제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느 산을 오르든, 쪽빛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게 최대의 장점. 이러한 자연적인 조건으로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들이 거제도를 찾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병산 산행은 상문동 심원사 계곡에서 시작 할 수 있지만, '황제의 길'이 있는 동부면 고갯마루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도로변에는 차를 주차할 빈 공터가 있어 편리하다. 정상까지는 1.5km. 얼굴에 마찰이 일 정도로 바람이 분다. 모자가 벗겨질 것만 같다.
산속으로 들어서니 찬 바람은 조금 피할 수 있다. 떨어진 낙엽은 바싹 메말라 황량한 모습이다. 단풍나무 잎사귀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다. 완연한 봄이 오지 않아서일까, 아직까지 푸른 새싹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경험에 의하면 산행은 시작한지 30분이 제일 힘들다는 생각이다. 근육도 풀어지고 심장도 안정적으로 박동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갈 수 있는데 까지 땅만 보고 걸었다. 오후 두시가 넘어서 산행을 한 탓인지, 맞은편에서는 등산객들이 무리지어 하산을 하고 있다.
그냥 간편하게 산에 잠깐 다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배낭도 준비하지 않은 탓에 불편하기 그지없다. 양손에 든 간단한 먹을거리를 싼 봉지와 카메라가 상당히 귀찮을 정도로, 몸의 균형을 잡기도 어렵다. 바위에 걸터앉아 잠깐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 동안 쪽빛 바다에 풍덩 빠져 놀았다잠시 후 다시 옮기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사방이 확 트인 산 중턱에 올라섰다. 온 몸에 흐른 땀이 찬 바람을 맞이하자 시원함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다. 내려다보는 남해 거제도 바다.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푸른빛 하늘색 바다와 쪽빛 바다가 연결돼 있는 풍경이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는 더 새파랗다. 숨을 고르며 앉은 바위 밑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현기증이 인다.
쪽빛바다는 크고 작은 섬을 품고 있다. '천국의 섬'이라 불리는 외도는 형제섬인 작은 섬 동도를 껴안고 평온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안쪽으로는 2010년 행정안전부가 전국 186개 개발대상 섬 중에서 '명품 섬 베스트 10'에 선정된 내도가 동무하고 있다. 거제도 최고의 해수욕장인 구조라해수욕장은 하얀 모래 살을 드러낸 채 때 이른 일광욕에 빠져있다.
항아리 속에 담겨 있는 듯 보이는 작은 섬은 윤돌섬. 음력 정월 대보름과 2월 사이 바닷물 빠짐 현상이 최고조에 이르는데, 이를 영등시라 부른다. 이 때는 바지를 걷어 올릴 정도면 맞은 편 윤돌마을까지 걸어서 건너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이 섬을 효자섬이라고도 부르는데, 전설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윤씨 성을 가진 형제 셋이 홀어머니를 모시며 섬에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바다 건너 한 영감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영감의 아내는 바다에 물질하러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된 것. 홀로 된 둘은 깊은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는 남이 알까봐 몰래 밤을 틈타 영감을 만났는데, 추운 겨울이면 섬을 건너기가 몹시 힘들었던 것. 어쩌다 이를 알게 된 아들 삼형제는 어머니의 사랑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돌다리를 놓아 편히 건너게 해 주었다는 것.
해안가를 따라서는 거제도 최고의 휴양지를 꿈꾸는 마을 망치리가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쪽빛 바다는 여행자를 불러들이기엔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다.
내겐 필요한 것도 어떨 때는 무거운 짐, 버려야 하는 깨달음한동안 쪽빛 바다에 풍덩 빠져 놀았다. 고개를 돌려 360도 회전하며 파노라마를 본다. 멀리 통영 쪽 남해는 떨어지는 오후 햇살에 가물가물 거린다. 노자산 작은 봉우리가 눈앞에 있고 섬 안의 작은 댐, 구천댐도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데 50분이면 충분한데, 1시간 10분이 걸렸다. 3시가 넘은 때늦은 시간, 점심은 김밥으로 배를 채웠다.
하산 길은 그래도 여유롭다. 최소한의 배고픔을 풀기 위해 챙긴 작은 먹을거리, 크게 무거운 짐은 아니지만, 오를 때는 그 가벼움도 내겐 짐이었다. 평소엔 그리 무겁지도 않은, 정말 필요한 카메라도 이날은 귀찮은 존재의 짐일 뿐이다.
가지고 싶고 소중한 것도 때에 따라서는 귀찮은 존재가 되는 짐.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 짐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작은 깨달음 하나를 깨우쳤다.
들머리 반대쪽에 위치한 심원사는 주인이 없는지 고요함 속에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절터 마당과 전각을 둘러보는데, 개 두 마리가 주인대신 여행자를 맞이한다. 꼬리를 흔들지만 겁을 먹었는지 다가오지 않고 꽁무니를 뺀다.
야산 주변으로는 봄꽃의 대명사인 얼레지가 지천으로 펴 있다. 타원형의 잎은 푸른색을 띠고 피었건만, 추위 탓인지 꽃망울은 아직 피우지 못하고 있다. 쭈뼛한 모양의 아름다운 꽃잎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다음주 가 돼야만 그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질투라는 꽃말을 가진 얼레지를 보니, 왠지 모를 질투심이 인다.
작은 계곡엔 맑은 물이 시원한 소리로 봄노래를 부른다. 계곡으로 내려가 손에 물을 떠 담았다. 손바닥에서 봄이 옴을 느낀 하루 산행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거제지역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뉴스앤거제> 그리고 제 블로그(http://bamnwind.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산행정보
◦ ① 다리골 → 심원사(25분/0.8㎞) → 정상(35분/1.2㎞) = 총 1시간/2Km 소요
◦ ② 신현 일운 경계 고개 → 다리골재(40분/1.3㎞) → 정상(약35분/1.2㎞) = 총 1시간 15분/2.5Km 소요
◦ ③ 망치정수장 → 정상(45분/1.5Km) = 총 45분/1.5Km 소요
◦ ④ 망양공동묘지 → 망양고개(35분/1.2km) → 다리골재(1시간 15분/2.5km) → 정상(35분/1.2㎞) = 총 2시간 25분/4.9km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