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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은행 누리집에서 돈을 이체하려고 할 때, 관공서 누리집에 들어가서 서류 발급이나 세금을 내려고 할 때마다 '액티브 엑스'라고 하는 프로그램들을 컴퓨터에 먼저 깔아야 한다. 무척 귀찮고 찜찜하기도 하지만, 보안을 위한다니 뾰족한 대안이 없다.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을 내 컴퓨터에 깔지 않으면 일을 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깔아' 해왔다.

그러다 아마존(Amazon)이라는 유명 해외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 적이 있었는데, 웬걸. 이곳은 우리나라처럼 각종 보안용 프로그램은커녕 내 결제 카드의 정보만 입력하면 된다. 종종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아마존이나 이베이(eBay) 같은 누리집에 들어가면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여기는 왜 우리나라처럼 보안을 위한다는 액티브 엑스나 공인인증서 같은걸 요구하지 않을까.'

<한국 IT 산업의 멸망>의 저자 김인성은 이런 한국의 인터넷 환경을 '이너 서클 (Inner circle)의 촌스러움'으로 규정한다. 한 때는 최첨단 아이디어 뱅크였고, 자부심을 가지고 인터넷을 사용해왔던 우리. 한국의 IT 산업은 더 이상 세계의 IT 트랜드를 선도하거나 대등하게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그저 세계적인 추세를 뒤쫓거나 과거에 이뤄놓은 성과를 까먹으며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은 어떻게 10년도 되지 않아  IT 산업의 본류에서 '아류'로 변했을까.

책장을 넘기다보니 요즘 유행어대로 '무료 통화를 해주던 다이얼패드 어디 갔어, 우리의 순수 원천기술 와이브로 다 어디 갔어!'라는 외침이 절로 나온다. <한국 IT 산업의 멸망>은 자신이 IT 개발자이기도 한 저자의 고민과 외침, 그리고 대안이 돋보이는 책이다. 또한, 인터넷, 모바일, 스마트TV까지 사용자 혹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알기 쉽게 쓰인 IT 관련 기술과 이슈, 트랜드에 관해 많은 사실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다.

폐쇄와 독점으로 얼룩진 한국 IT 산업

<한국 IT 산업의 멸망> 겉표지
 <한국 IT 산업의 멸망> 겉표지
ⓒ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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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만 떨어져서 IT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IT분야는 독점을 통해 시장을 장악하려는 경향이 심한 곳이다. 시장을 지배하는 업체들은 대부분 점유율을 무기로 자신들의 기술을 표준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IT 역사를 통틀어 결국 살아남은 것은 개방과 표준을 추구하는 것뿐이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후진하는 한국 IT 산업의 원인을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거대 기업들의 독점욕과 권력자들의 폐쇄성에서 찾는다. 이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비자들의 선택뿐이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한국 IT산업은 일부 대기업만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툭하면 컴퓨터에 설치해야 하는 MS(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액티브 엑스는 인터넷으로 안전한 거래를 보장하는 표준이 없었던 1990년대 중후반에는 나름대로 유용했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사용 중인 표준 보안 기술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한다. 하긴 아마존, 이베이 등 해외 쇼핑몰 누리집이나 해외의 은행들은 액티브 엑스 없는 환경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누리집들은 한국의 누리집들보다 안전하지 못할까? 오히려 그 반대다. 뉴스에도 몇 번 크게 보도됐듯이 한국의 쇼핑몰 업체들은 한 해가 멀다하고 보안 사고를 내고 있지 않은가. 

한때 꽃피었던 한국의 IT산업은 사회가 보수화되고 대기업들이 독점해 버리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세계를 놀라게 할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있고 그 공백을 외국 세력의 거센 도전이 메우고 있다. 정부는 아무런 대안이나 전망 없이 거대 업체들에 끌려 다니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민주화에 역행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처럼 한국의 IT산업 또한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SKT와 KT는 한국이 개발했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CDMA2000과 와이브로를 고의적으로 도태시키고 현란한 TV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LTE를 강요하고 있다.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며 외국 기술을 도입,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만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형 SNS였던 싸이월드는 '실명인증'의 덫에 걸렸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구축한(경쟁 없이 먹고 살 수 있었던) 폐쇄적인 생태계에 갇혀버려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 인터넷을 규정하는 열쇳말... '촌스러움'

자체 보안 프로그램. 은행, 관공서 등에서 인터넷 뱅킹이나 서류 발급을 받으려면 그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야 한다.
 자체 보안 프로그램. 은행, 관공서 등에서 인터넷 뱅킹이나 서류 발급을 받으려면 그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야 한다.
ⓒ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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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인터넷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언론 자유, 특정 기업이나 서비스에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망 중립성 정책,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프라이버시 보호법 등은 한국 인터넷 현실에서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다시 한 번 한국의 촌스러움이 문제가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본문 중에서)

인터넷 같은 열린 시장에서 승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글로벌'한 정책이다. 여기에는 한국적인 특수성이 자리할 곳이 없다.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 그러나 IT, 특히 인터넷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책 입안자들, 언론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권력자들, 그리고 규제 안에서 이익을 보는 몇몇 국내 상위권 업체들이 한국 인터넷 사업의 미래를 막고 있는 현실이 존재한다. <한국 IT 산업의 멸망>은 이런 불편한 현실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너서클의 촌스러움'은 이 정권 들어 결국 민주주의의 기본요소인 자유로움까지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인터넷의 언론 자유를 방종으로 보고 실명제를 통해 사용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은 마음대로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 위해 법까지 제정했다. 실시간 검색어가 조작되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게시글이 삭제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저자는 숨 막히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가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를 설명한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고, 액티브 엑스를 요구하지 않는다. 게다가 댓글을 단다고 잡혀가지도 않는다. 누리꾼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온라인 망명객'이 돼버렸다.

IT,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
ⓒ 애플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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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전망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으른 인문사회학, 반자본주의, 좌익, 친북, 종북 세력으로 매도되어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는 정치에서의 진보도 사회를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보와 희망은 IT가 쥐고 있다. 그것은 열린 인터넷 서비스, 제대로 만든 스마트폰,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스마트TV속에 있다."(본문 중에서)

저자는 '진보는 IT에 있다'라고 말한다. 애플의 아이폰이 도입되면서 한국의 전자상거래 시스템과 무선인터넷 요금에 변화가 일어났듯이 우리도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혁신은 한국 사회를 이끄는 힘이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미 여러 번 세상을 바꾼 애플에서 혁신의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 한국 이동통신 분야의 각종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하고 인터넷 환경까지 변화시킨 아이폰을 떠올려보면 그리 무리수를 둔 것도 아니다.

'앱등이'(애플 추종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소리를 들어가며 저자가 말하는 첫 번째 원칙은 '세상을 당신 뜻대로 움직여라'다. 이 원칙으로 애플은 모든 휴대폰 제조 업체가 갈망했으나 아무도 감히 시도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두 번째 원칙은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 손가락 하나로 제어할 수 있는 작동 방식과 앱스토어라는 콘텐츠 유통 모델은 IT 생태계 개념을 새로 정립했다. 세 번째 원칙은 '싸우기 전에 먼저 내공을 길러라'다.

위 세 가지 원칙보다 더 큰 요인이라 할 만한 '초심 유지하기'의 한 방법으로 저자가 권한 방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재미를 자아낸다. 그것은 바로 '여행'. 여행을 통해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깊은 몰입이 가능하며, 일상에서 벗어날수록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단다. 수많은 혁신을 이뤄낸 스티브 잡스의 삶의 방향은 젊은 시절 인도로 무전여행을 떠났을 때 이미 결정됐을 것이라는 데 나도 크게 동감한다.

덧붙이는 글 | <한국 IT 산업의 멸망> (김인성 씀 | 북하우스 | 2011.04 | 1만5000원)



한국 IT산업의 멸망

김인성 지음, 북하우스(2011)


태그:#한국IT산업의멸망, #김인성 , #스티브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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