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을 관람할 때, 정확하게 표현하면 엘리자벳이 'Tod(토트, 죽음)'을 만나는 장면에서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고지키>(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록한 책)에서 니니기노 미코토는 바위 아가씨와 꽃 아가씨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처지다. 니니기노 미코토가 바위 아가씨를 선택한다면 견고한 바위의 생명력처럼 장수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반면, 그가 꽃 아가씨를 선택한다면 아름답긴 하지만 쉽사리 시드는 꽃처럼 요절하고 만다. 그럼에도 니니기노 미코토는 장수의 상징인 바위 아가씨를 택하지 않고 찰나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 아가씨를 선택한다. 이어령 교수는 일본 문학 가운데 하나로만 치부하기 쉽지만 일본인의 정신 가운데 항상 죽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통해 짚어내고 있다.
그렇다. 비엔나 뮤지컬 <엘리자벳>을 관람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죽음'이라는 타나토스(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다.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하는 순간만큼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로 전개된다. 언니 헬레나의 맞선 자리에서 들러리로 앉아 있다가 우연찮게 황태자가 엘리자벳에게 반해 결혼에 골인하니 말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의 운명은 황태자와의 결혼식이 되레 꼭짓점, 인생에 있어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되고 만다. 무도회장에서 엘리자벳이 죽음을 만나는 순간에는 남편인 요제프도, 다른 궁중 신하들도 그대로 멈춰서 있다. 오직 엘리자벳만이 '죽음'을 볼 수 있다.
죽음의 천사들과 함께 다니는 '죽음'은 저승차사처럼 차갑고 냉혹한 이미지가 아니라 댄디보이에 가까운 매력남이다.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이제 갓 결혼한 남편보다도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인다. 엘리자벳이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과 조우했기 때문일까. '죽음'과 만난 이후부터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외형적으로는 뭇 여성들이 흠모하는 황후의 길을 걷지만, 엘리자벳은 창살 없는 감옥인 궁정 안에서 영혼이 잠식당하고 만다. 마마보이 남편 요제프와 요제프의 어머니(엘리자벳의 시어머니) 소피로 말미암아 영혼은 차츰 생명력을 잃어간다.
궁정 생활 가운데서 도사리는 시어머니 소피의 음모와 계략으로 인해 엘리자벳의 심신은 날로 쇠약해질 따름이다. 외화내빈의 궁정 생활을 타파해 줄 이는 남편 요제프가 아니다. 만일 엘리자벳이 숨 막히는 궁정 생활의 구원자로 남편을 여긴다면 그녀의 문 밖에서 남편을 박대할 리 만무하다. 엘리자벳이 힘겨워할 때마다 '죽음'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메피스토펠레처럼 간사한 유혹을 한다. 자신의 품에 안기라고. 하지만 엘리자벳은 '죽음'이 달콤하게 유혹할 때마다 존재의 사멸보다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신봉하고 '죽음'의 유혹을 거부한다.
엘리자벳과 '죽음'의 역학관계를 라캉의 정신분석으로 바라보면 '죽음'의 유혹은 상징계에서 상상계로의 전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대공비 소피와는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형성된 지 오래 됐고, 시어머니 소피의 음모에 의해 요제프를 통해 매독이 옮은 후로는 남편과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만다. 궁정이라는 상징계는 엘리자벳이 서서히 말라죽어가길 바라고 있다. 궁정이라는 상징계는 엘리자벳이 여행을 통해 도피한다고 해결할 수도 없는, 엘리자벳이 어찌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상징 체계다.
'죽음'은 견고한, 엘리자벳을 잡아먹지 못해 살기등등한 궁정이라는 상징계를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대안이자 엘리자벳의 상상계다. <애니 매트릭스>로 비유해보자. 네 번째 에피소드인 'Kid's Story'에서 꼬마는 자신이 가상 세계라는 감옥에 갇혔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를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사실이 아니라면 꼬마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잃고 만다. 하나 꼬마는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고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그 결과는? 떨어져 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트릭스라는 가상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인간 저항군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 <애니 매트릭스>에서 꼬마가 매트릭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방법이 필요하듯 엘리자벳이 궁정이라는 숨 막히는 상징계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상상계가 필요하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에겐 타나토스인 '죽음'은 '독'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자벳에게 있어 '죽음'은 비루한 상징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처소다. 엘리자벳이 소녀 시절 나무에서 떨어질 때 '죽음'이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던 건 바로 '죽음'만이 엘리자벳의 모든 생애를 통틀어 상상계로 이끌어줄 유일한 대안이란 걸 암시하는 예언적 현시다. 엘리자벳을 구원해 줄 상상계를 안내해 줄 이가 '죽음'이 아니라면 굳이 '죽음'이 엘리자벳의 결혼식 무도회장에 얼굴을 내비칠 리 만무하다. 상상계인 '죽음'은 엘리자벳에겐 '약'이 된다.
살아 있는 엘리자벳을 영면으로 끊임없이 유혹하는 '죽음'이라는 상상계는 <엘리자벳> 안에서 단 한 번도 수동태로 나타난 적이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엘리자벳은 '죽음'의 유혹 앞에서 강인했던 여인이지만 단 한 번 '죽음'을 진정으로 원했던 때가 있다. 아들 루돌프가 자살했을 때다. 루돌프가 자살하기 이전에는 늘 엘리자벳이 때로는 매몰차게,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유혹을 물리친다.
하지만, 아들이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났을 땐 진심으로 자신에게도 죽음을 달라고 '죽음' 앞에 매달린다. 하지만 이번엔 '죽음'이 엘리자벳의 소원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죽음'은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에만 응한다. '죽음'은 능동적 상상계의 형태로 엘리자벳의 목숨을 바라지, 결코 수동적으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길 원하진 않는다. 진심으로 죽길 원하지만 죽지 못한다는 역설, 이는 '죽음'이 엘리자벳에게 있어 유일하게 '독'으로 작용하는 찰나의 파르마콘(pharmakon)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자의 개인블로그(http://blog.daum.net/js7keien)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