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철학 VS 철학> 저자인 강신주 박사가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김수영 다시 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저자인 강신주 박사가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김수영 다시 읽기' 강의를 하고 있다. ⓒ 김동환

"흔히 김수영을 '4·19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김수영은 사실 4·19 혁명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인이었습니다. 혁명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시작되어야 진정한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던 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철학 VS 철학>의 저자인 강신주 박사는 "시인 김수영이 가지는 독특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한국전쟁) 전후에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지난 21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린 '김수영 다시 읽기' 세 번째 강의에서 김수영이 6·25를 어떻게 경험하고 극복했는지에 대해 강의했다.

강 박사는 "김수영은 2년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신분으로 6·25를 겪으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며 "그의 자유정신은 어떤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생과 사가 오가는 수용소에서 비루함과 굴욕감을 충분히 맛보며 자라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사가 오가는 포로수용소에서 알게 된 '자유'

김수영은 1950년 4월 서울 돈암동에서 1927년생 부인 김현경과 동거에 들어간다. 강 박사는 "문학이나 회화에 조예가 깊은 재원인데다 수려한 미모까지 갖춘 김현경과 김수영의 결혼은 누구든지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선남선녀의 만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과 남한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산산조각 난다. 임신한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던 김수영은 1950년 8월,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끌려가게 된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김수영은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평안남도 순천에서 의용군 탈출에 성공한 그는 도중에 민간인의 옷을 얻자마자 자신이 가진 총과 인민복을 땅에 묻고 부인 김현경을 찾아 남쪽으로 향한다. 도중에 북한군에 발각되어 총살 직전까지 갔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서울로 돌아온 김수영은 부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집 근처에서 남한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인민군 첩자로 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의용군에서 탈출한 김수영은 도중에 북한군에게 발각됩니다. 이때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은 원래 인민군인데 유엔군의 습격을 당해 민간인으로 가장했다고 거짓해명을 하지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땅 속에 파묻었던 총과 인민복이 필요했습니다. 김수영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인민군과 함께 그의 총과 인민복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 필사적으로 산을 파헤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신없이 땅을 파면서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못 찾으면 죽는다'는 것과 '비루하다'는 두 가지의 참담함이 들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시인 김수영에게는 깊게 남는 기억이었겠지요."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가 나뉘어 서로를 죽이던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김수영에게 더욱 깊은 기억을 남겨준 공간이었다. 아침이면 공용 화장실 변기 속에 살해되어 토막난 시체조각들이 차 있는 상황이었다. 강 박사는 "당시는 어떤 이념이든 이념의 옷을 걸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며 "김수영은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의 자유가 이념에 의해 어떻게 유린당하는지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김수영은 지인의 도움으로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1952년 12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게 된다. 이 지옥같은 경험을 마친 지 6개월만에 김수영은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라는 긴 시를 쓴다. 강 박사는 "여린 시인 김수영에게 포로수용소에서의 나날은 매번 삶과 죽음, 이념과 국가에 대한 고민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며 "이 시는 그가 6개월 만에 자신의 거제도 생활을 응시하며 정리해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마찬가지로 김수영에게는 '포로수용소에서 거짓말만 했던 내가 어떻게 시를 쓰나'하는 내적 물음이 남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5개월 만에 김수영은 자신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정리하고 시를 썼거든요. 저는 이 5개월 동안 김수영이 우리가 아는 시인 김수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수용소에서 비루함과 굴욕감을 충분히 맛보며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아내의 배신.. 김수영이 연애시를 못 쓰는 이유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서는 전쟁통을 겪으며 김수영에게 생긴 트라우마가 하나 더 발견된다. 강 박사는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라는 구절을 통해 김수영의 부인인 김현경에 얽힌 일화를 설명했다.

"김수영이 의용군에 끌려간 후 그의 아내 김현경은 첫째 아들 김준을 낳은 후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가 김수영의 고등학교 동창인 이종구와 살림을 차립니다. 의용군과 포로수용소에서 오직 김현경만 떠올리며 목숨을 챙겼던 김수영에게 이런 김현경의 행동은 참을 수 없는 좌절이자 모욕이었지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김수영은 모욕감을 누르고 김현경을 찾아가서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김현경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지요."

김현경과의 일로 김수영이 받았던 상처는 그의 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수영은 부산에 내려가 김현경에게 거부당하고 돌아온 후 지은 시가 <너를 잃고>라는 시를 쓴다. 강 박사는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모멸감도 참아냈지만 아내 김현경으로부터 받은 모멸감은 참을 수 없었다"며 "이 시를 읽으면 더이상 여자를 여자로 사랑하기 힘들어진 김수영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김수영 다시 읽기'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김수영 다시 읽기'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 김동환

강 박사는 "김수영은 박인환이나 김춘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큼 바닥까지 내려간 삶을 살지 않았다는 의식 때문이었다"며 "김수영의 눈에 동시대 작가들의 시는 그저 현란한 기교만 난무할뿐 그 안에서는 절박함과 진실함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나 권력, 이념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지 김수영만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도 드물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 김수영을 만든 요소들이지요. 반면 김수영이 잃은 것도 있습니다. 탁월한 인문정신을 가진 시인들이 대부분 연애의 달인이었지만 김수영은 아내의 배신 때문에 시뿐만 아니라 연애와 사랑에서도 영원성을 노래할 수 없게 되었지요."

강 박사는 "김수영은 사랑하면 섹스를 못하고 섹스를 하면 사랑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며 "그가 말년에 썼던 <성>이라는 시는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 아프게 다가온다"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김수영#강신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