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선이 있죠. 누가 집권하든, 선거 끝나면 다시 손 잡으러 올 것이라고, 재벌쪽에서 이야기하죠. 또 하나는 누가 집권하든, (재벌)개혁 실패하면, 조기에 레임덕이 온다는 거예요.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그러더군요."
곽정수 <한겨레21> 기자의 말이다. 또 등장한 '재벌개혁'에 대한 전망이다. 다소 부정적이다. 과거 개혁정부에서 실패한 경험도 한몫한 듯 보였다. 그는 대기업과 관련해선 베테랑 기자다. 25년 기자생활 가운데, 20년 넘게 경제기사를 써 왔다. 특히 기업 취재를 오래했다. 그의 이름 앞에 '대기업 전문'이 따라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틈나는대로 공부도 했다. 지난 2010년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대중소기업의 불공정한 하도급 관계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논문이었다. 최근엔 <재벌들의 밥그릇>(홍익출판사 펴냄)이란 책도 냈다. 그는 책을 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23일 오후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에 나선 그는 왜 또 재벌개혁인지, 과연 가능한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날 특강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10조 이익 달성 때, 삼성전자 부회장 "납품 단가 30% 깎으라"
그는 강의 시작 전에 초콜릿을 먹고 왔다고 했다. 요즘 선거관련 뉴스를 보고 우울했다고 했다. 곽 기자는 "한마디로 김이 샜다'고 말했다. 올해 초 정치권에서 앞다퉈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외칠 때와 사뭇 달라진 분위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재벌개혁은 공수표로 끝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강의 전부터 풀이 죽으면 안 되겠다 싶어 초콜릿을 먹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어 그가 만났던 20대 기업 총수와 삼성전자 구매담당 간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그 기업 사장은 자기가 보더라도 중소기업이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해요. 그렇게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큰 대기업에 납품을 합니다. (자신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에게도 똑같이 단가인하를 요구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죽으니까…"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 이야기는 좀 더 충격적이다. 2009년 이후 사상최대 실적 뒤엔 중소기업의 희생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곽 기자가 만난 구매담당 직원이나 중소기업 사장의 하소연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선다. 그는 "2010년 초에 이른바 삼성전자가 100조 매출에 10조 이익을 이뤘다면서 언론이 떠들썩했다"고 회고했다.
곽 기자는 "바로 그때 삼성전자 최지성 사장(현 부회장)은 아래 직원들에게 협력업체 단가를 30% 깎으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내부에서 '이럴 경우 협력업체가 죽는다'고 하자, '그것은 너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곽 기자는 주장했다.
그의 이야기는 책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당시 한 협력업체 사장의 말이다.
"그 사장은 협력업체들의 도산을 우려하는 임직원들에게 '사람이 바뀌지, 회사는 늘 존재한다. 협력업체가 아무리 망해 나가도 자재 넣을 회사들은 주인이 바뀌든, 다른 업체가 됐든 얼마든지 계속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재벌들의 밥그릇>에서 인용)
그는 "최 사장은 협력업체와 상생경영 한다면서 CEO 직속으로 '상생협력센터'를 만든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중소 협력업체가 죽든 살든 대기업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곽 기자는 또 "한 협력업체는 삼성전자 쪽에 전자우편으로 살려 달라고 통사정까지 했다"면서 "하지만 그의 호소는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기에 가까운 MB노믹스로 양극화 심화되고, 민심 이반 극심"
곽 기자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현대차도 마찬가지"라며 "재벌들의 탐욕과 사회적 책임 경영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이런 불공정 거래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각종 감세와 규제완화 등이 덧붙여지면서, 대기업의 독과점과 경제력 집중이 심화됐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재벌의 불공정거래까지 더해지면서 중소기업은 고사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현 정부가 내세운 '친(親)기업적'인 정책은 말 그대로 사기에 가깝다"면서 "친기업이라는 이야기는 반대로 말하면 반(反)소비자라는 것인데, 과연 말이 되는 정책인가"라고 반문했다.
곽 기자는 현 정부는 전형적인 친 재벌적인, 친 대기업 정책일뿐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왜곡된 경제정책으로, 중소기업과 서민 등의 고통이 심해지면서 민심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뒤늦게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담합 등에 조사에 나서고,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재벌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떨까. 재벌 개혁은 가능할까. 국민들은 다소 부정적이다. 학습효과 때문이다. 곽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새누리당의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한편의 쇼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민주통합당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야당내의 재벌개혁 반대론자인 이른바 '엑스(X)맨'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곽 기자는 그래도 재벌 개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현재의 경제상황에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4가지 전술도 제시했다. 하나는 재벌과 재벌총수를 분리해서 대응해야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죽이기가 아니라, 오히려 개혁을 통해 재벌을 살리자는 것이다. 이어 재벌에 대한 사전-사후규제의 최적화된 조합을 찾고, 대중소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벌들의 사회적 책임 경영도 제도화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재벌중심 성장 전략 대안 필요... '한국형 동반 성장 모델' 찾아야
곽 기자는 "그동안 재벌개혁을 위한 여러 이야기들은 꾸준히 제시됐었다"면서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경제의 재벌중심 성장 전략을 대치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중소기업,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대타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국형 동반 성장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노사정 사회적 타협을 하나의 좋은 사례로 들었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노동조합 역시 양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자세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정규직 노조가 나서, 비정규직과의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공정한 시장 경쟁이 이뤄지도록 규제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치열한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는 더이상 오래가기 힘들다"면서 "이해당사자들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양보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책 마지막에서도 "이대로 가면 한국경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썼다.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절실함이다. 그가 강연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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