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됐는데, 가운데 줄이 다 비었어요."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PD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객석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주르르 여섯 자리나 비었으니, 연출을 맡은 PD도 당황할 수밖에. 문제는 그 가운데 자리가 내 이름으로 예약돼 있었다는 것이다. 사연인 즉슨 이렇다. 국악 공연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친구가 내게 표를 부탁했고. 남편에, 두 아이에, 사촌까지 함께 온다던 친구를 위해, 어렵게 자리를 예약했다. 나중에 만난 친구의 말.
"애들이 지루할 것 같다며 싫다잖아." 국악은 지루하다는 오래된 편견. CF 찍는 것도 아닌데, 입에 침을 튀겨가며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친구 사이에 못할 말을 할 수도 없고. 그저 넌지시 이런 장면을 한 번 보여주면 어떨까 싶었다.
[장면 하나] 홍대 클럽의 대금 소리... 징했다
지난해 초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복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패션 리더의 아이템이라는 통바지에 시원스레 '확' 파인 티셔츠까지... 그녀의 평소 단정했던 옷차림과는 거리가 멀다. 의아해하는 내게 불쑥 던진 후배의 말.
"홍대에 왔잖아요."그렇다. 우린 그야말로 홍대에 진출(!)한 것이다. 홍대 앞을 주무대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깐 일이 뭐 대수로울까 싶지만. 신상 명세서를 펼쳐 보면 사실 우린, 홍대의 문화하고는 거리가 제법 먼 사람들이다. 각기 아홉 살짜리와 네 살짜리의 좀 독특한 아들을 키우는 두 아줌마. 어린이 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만난 사이이긴 하지만, 우리 둘의 주요 대화거리는 아무래도 가정사에 집중돼 있었다. 게다가 그즈음 후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하며 심신이 심히 지쳐 있는 상태. 우리에게는 백신이 필요했다.
일상의 고단함을 단번에 물리쳐 줄 외출. 그 외출의 핵심 키워드는 '국악'이었다. 여기서 국악이라는 말에 '과연?'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면, 그건 바로 국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 터. 하지만 여기에 이런 말이 덧붙여진다면?
"이스터녹스. 퓨전국악 그룹. 스탠딩 공연, 맥주 무제한 제공."
이쯤 되면 호기심이 동할 법도 한데. 구불구불 골목길을 따라 '시어터 판'이라는 소극장에 에 도착하자,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극장 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치 클럽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오늘 공연은 징한 공연이 될 겁니다."이스터녹스 대표의 말마따나 우린 맥주를 마시면서 징하게 한 판 놀기 시작했다. 집에 두고 온 아이나 산더미 같은 일 같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말이다. 드럼과 북의 어울림, 키보드와 대금 소리의 조화로움, 동서양 음악의 절묘한 호흡. 그리고 터져나갈 것 같은 이들의 에너지. 술에 약한 후배가 맥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자 우리는 제법 필(?)이 충만해졌다. 이때 귀에 꽂힌 이 말.
"국악으로 점프 점프할 수 있게 해 드릴게요."장단은 점점 빨라지고, 관객과 연주자는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곡이 연주되었을 때, 몸치라는 후배까지도 리듬을 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국악의 장단과 호흡이 몸에 말을 걸어온 것이다. 실로 오래간만에 춤을 춘 건 나 역시 마찬가지. 우린 국악이라는 백신 한 대씩 맞고 다시 일하는 엄마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장면 둘] 열살 사내아이도 완전몰입... 이게 국악의 힘
지난 겨울 방학이 거의 끝나갈 즈음, 아이의 친구 둘과 함께 서울 남산 국악당을 찾았다. 이름하야, 체험학습 보고서 작성을 위한 공연 관람. 방학이면 한 번씩 하게 되는 공연 나들이지만, 이번엔 조금은 특별한 경험이었음 싶었다. 나름 고민의 시간을 가지며 선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친숙한 가야금 공연.
오늘의 등장 인물은 막 3학년에 올라가는 사내 녀석 셋. 선생님까지 이름을 헛갈려 하는 김재민과 김민재. 그리고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 만점인 김세현. 제 또래 아이들처럼 축구라면 사족을 못 쓰고, 두 걸음이 넘으면 바로 뛰어야 하는 망아지 같은 녀석들이다.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이 아이들과 국악이라?
"그동안 국악 공연은 한 번도 안 봤는데, 잘 견딜까?"아닌게 아니라 세현 엄마는 걱정 아닌 걱정을 풀어놓는다. 은근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믿는 구석도 없이 이 녀석들을 공연장으로 데려온 건 아니었다. 이번 공연은 '천주미 가야금병창 창작시리즈 II SHOW!' 가야금 연주자 천주미는 드물게 연주와 노래, 거기에 퍼포먼스가 가능한 인물이다. 공연의 제목을 'SHOW'라고 붙인 것만으로도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주었는데. 독특한 시각적인 자극이 있다면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객석에 앉은 삼총사는 '어디 한 번 봐 줄까?'하는 표정이었다. 한 곡 한 곡 연주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삼총사의 반응을 살펴봤다. 앞 순서의 가야금 병창 곡은 녀석들 눈높이에 맞지 않은지,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이어진 곡은 안도영 작곡의 초연곡 '째깍째깍'. 무대에 선 연주자들은 마치 나무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계의 초침처럼 연주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 움직이는 그 모습이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경쾌한 리듬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 흥이 많은 재민이는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 뒤의 공연은 지루할 짬이 없었다.
심지어 공연 직전까지 '시크릿'이었다는 보너스 트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였다. 25현 가야금 곡으로 편곡된 곡이 연주되자마자,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스팽글을 달았다는 천주미의 의상이 '번쩍' 하고 빛을 발한다.
그리고 마지막곡 'SHOW'. 아찔한 하이힐을 신고, '각(脚)'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움직임이 더해졌다. 연예인들의 댄스 개인기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 아이들은 연주자의 몸동작을 따라하며, 노래를 같이 부르며 무대 위의 연주자와 하나가 되었다. 삼총사가 군인 박수를 치며 '앵콜'을 연호하는 것은 당연지사.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에게 공연이 어땠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자꾸만 흥얼거리는 'SHOW'의 가사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이쯤 되면 말보다 진한 감상평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지루한 것은 단 5분도 견디지 못하는 열 살 사내아이들을 열광케 한 천주미의 가야금 공연, 정말 훌륭했다.
오래된 편견을 깨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공연장을 찾으면 '국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연주자들이 한복을 입고 다소곳하게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부터 깨지며, 더 가벼워지고 유쾌해진 국악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봄이지 않은가.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듯 낡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국악은 지금 새로운 싹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