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진우입니다. 지난 2년 간 평택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7명(현재 2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배우자, 부모 등 가족의 자살까지 합치면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 이 모든 것이 2년 전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2500명이 해고 된 후 벌어진 일입니다. 살아남은 해고 노동자들 중에서 일상적으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70% 넘는다고 합니다. ...
여러분 와락 안아주세요. 우리 함께 살아요.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쌍용차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꼼수다 23회> 작년 가을, <나꼼수>에서 흘러나오는 주진우 기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잊고 싶었던, 그리고 잊고 있었던 하나의 사실이 떠올랐다. 한 때 나도 해고 노동자였다는 사실.
순간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로 거리를 떠돌던 시절, 옆에서 연대하고 지지하고 응원해 주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은 복직을 했을까? 현장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여전히 길거리에서 노숙 투쟁을 벌이고 있을까?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이 '설마'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지속된 죽음이 말해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이야기 그리고 KBS계약직 지부
2009년 여름,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국회와 언론이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그 수상한 시절에 나는 갑작스럽게 KBS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다. 이유는 하나. 비정규직. 해고통지서는 그 여름내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내가 노동자임을 일깨우는 첫 번째 사건이었으며,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커밍아웃하게 하는 계기였으며, 해고노동자로서 권력과 자본을 대하던 나의 몸과 마음의 배치를 전환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함께 해고된 친구들과 언론노조 산하에 KBS 계약직지부를 결성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비정규직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이렇게 해고되는 것은 억울하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만든 조합이었다. 구호 한 번 외쳐본 적도, 피켓 한 번 만들어본 적도 없던 친구들과 거리 위에 섰다.
국회와 KBS, 각 정당의 당사와 방송통신위원회를 오가며 매일 같이 1인 시위와 선전전을 펼쳤다. KBS 본관을 점거하는 점거 투쟁과 단식 농성도 빠지지 않았다. 때로는 KBS 사장후보 면접장에서, 때로는 국회 문방위 회의장 앞에서 비정규직 해고자 문제를 제발 해결해달라며 국회의원들과 KBS 이사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언론학자들에게, 시민에게 "비정규직 문제, 해고자 문제는 저희만의 문제가 아니니, 제발 관심 좀 보여 달라"는 내용 역시 수없이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 싸움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권력도 자본도 아닌, 일상에서 마주치는 냉소와 차별적 시선이었다. 해고는 너희가 못났기 때문에 당한 거라는 인식, 살아남은 노동자와 KBS를 위해 이제 조용히 사라지면 좋겠다는 시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사회적 무관심. 쓰레기통에 버려진 홍보물들, 허공 속에 묻혀버리는 구호들, 우리의 손길과 눈빛을 외면하는 사람들, 많이 아팠고, 쓰렸다.
그런데 이 아픔을 다독거려준 사람들이 있었다. 끊임없는 애정과 연대로 세상의 냉소와 아픈 시선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외로움의 구석으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를 내몬 것이 자본과 권력의 논리였다면, 그것을 와락 품어주었던 것은 인간과 노동자의 마음이었다.
KBS 계약직지부는 이 마음의 연대로 2011년 작년 여름 비정규직 해고자 복직 문제를 승리로 이끌었다. 복직을 희망하는 모든 해고자가 KBS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2년간의 투쟁의 결실이었으며, KBS 내외부의 많은 노동자의 연대와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믿기지 않은 결과에 조합원 모두가 부둥켜 울었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다. 나는, 우리는 무엇이 변했을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심리치유 공간 '와락' 만나다
모두가 끝났다고 부둥켜 울 때, 바로 그 지점에 늘 새로운 시작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복직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2011년 가을 우연히 <나는 꼼수다>를 듣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떠올리게 됐다. 이 분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 지부의 투쟁이 서울 여의도 KBS 주변에서 한참이었던 2009년 여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77일간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언젠가 거리 선전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를 켜니 MBC PD수첩에서 <쌍용자동차 운명의 10일> 파업 농성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나는 해고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나는,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권력과 자본의 폭력 앞에 무참하게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오래된 기억이 <나는 꼼수다>를 들으면서 갑자기 의식 이면으로 떠올랐다.
고백하자면, 주진우 기자의 호소가 있기 전까지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제가 나의 문제라고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77일간의 파업 기간 수많은 연대와 지지가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으로 향했고, 나는 그 연대의 힘으로 파업은 승리로 끝났다고 믿고 싶었다. 그게 사실이 아님을, 사회적 연대와 관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평택에서는 끝나지 않은 싸움이 지속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눈도 귀도 닫고 싶었다는 게 어쩌면 더 정확한 나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관심은 작은 나를 벗어나지 못했다. 복직 후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었고, 또 다른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그 새로운 국면에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였다는 기억, 경험, 정체성은 한편에 묻고 싶었다.
나의 외면, 나의 무관심과 상관없이 파업이 끝나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나빠졌다. 이를 증명하듯, 가끔 이름 모를 노동자와 그 가족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나의 지독한 무관심은 이 죽음조차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사건 중 일부로 치부했다. 이것은 내게 타자의 죽음에 대한 둔감함의 문제를 넘어선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명제를 그 누구보다 공감하는 해고노동자였던 내가, 또 다른 나의 죽음에 대한 둔감함이었다. 무관심이었다. 작년 가을 주진우 기자의 이야기를 <나꼼수>를 통해 듣다 이 불편한 진실에 많이 미안했다. 여전히 거리에서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참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와락을 찾아갔다. 작은 힘이지만 함께 하고 싶었다. 예전에 내가 해고되었던 그 시점, 수많은 애정과 연대의 마음, 인간의 따뜻한 마음들이 나와 우리 KBS계약직지부를 와락 품었던 것처럼….
매주 토요일 와락을 찾아간 지 어느덧 6개월이 흘렀다. 와락을 통해 많은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들을 알게 되었다.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적인 진압의 기억에 피폭된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 아픔, 외로움은 몇 자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선다. 와락은 그 표현할 수 없는 침묵과 분노의 역사를 품고, 또 다른 오늘의 희망을 일구는 곳, 잃었던 웃음을 되찾는 실천의 공간인 것 같았다.
이 공간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만을 위한 공간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넘어섰다. 이 땅에 권력과 자본의 폭력에 아팠던 기억을 가진 모든 사람이 서로 "괜찮다"며 토닥거리는 공동체, 한때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언젠가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는 누군가가 오늘의 해고 노동자 가족들과 연대하도록 매개하는 공간, 인간, 사랑, 연대, 웃음의 힘으로 권력과 자본의 폭력을 가볍게 넘어서는 공간. 내게 와락은 그런 공간이었다.
2012년 서울 희망광장 봄은 오고 있는 것일까?
지난 24일(토요일) 와락은 조용했다. 그날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문화제 눈물을 멈춰> 준비로 많은 사람이 서울에 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와락을 나서는데 한 아이가 손을 붙잡는다.
"삼촌 왜 벌써 가?""응. 삼촌 일이 있어서 오늘 일찍 서울로 돌아가야 해.""우리 아빠도 지금 서울에 있는데…. 열 밤도 더 지났어. 아빠 얼굴 본 게…. 엄마도 지금 서울 갔어. 아빠 만나고 온다고….""삼촌도 지금 혜진(가명)이 엄마랑 아빠 만나러 가는 거야.""정말? 가서 아빠 보면 혜진이가 아빠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줘."혜진이 아빠는 지난 3월 10일부터 서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99%의 희망광장'을 만들고 있다. <1박 2일>의 야외 취임이 웃음을 위한 기약 있는 게임이라면, 혜진이 아빠에게 야외 취침은 희망을 위한 기약 없는 버팀이다. 지난해 '희망버스'를 시작으로, '희망텐트', '희망뚜벅이', '희망광장'이 연이어 열리고 있지만, 해고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언제쯤 고단함이 끝날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희망"이란 별것이 아니다.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일할 수 있는 것,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는 것, 주말에 추운 서울 거리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적어도 이 정도는 우리 사회가 국민에게, 노동자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선진 일류국가라는 공허한 문구를 외치는 대신 정부는 국민의 최소한의 권리, 생존권, 인권, 존엄성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닐까? 자본은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말로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게 아니라, 노동자가 살아야 기업도 산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회복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언제까지 노동자라는 이유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할까? 언제쯤 우리는 눈물을 멈출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시청광장에는 희망광장이 펼쳐져 있다. 이 희망광장을 둘러싼 노동자의 목소리가 시청광장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총선의 큰 파도 속에서 희망텐트의 목소리는 쉽게 묻힌다. 언론 자유를 외치는 방송사 공동 파업에 비추어 이들의 목소리가 작게 느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정권이 바뀐다 해도 희망광장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믿는 것 역시 쉽지 않고, 방송이 바뀐다 해도, 노동자의 눈물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얼마나 커질지도 미지수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희망버스, 희망텐트, 희망뚜벅이, 희망광장으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희망릴레이가 노동자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이끌게 하는 작지만 큰 발걸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내일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지금은 그 희망의 발걸음을 응원하고 그 발걸음에 작은 힘들을 모아줄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고, 희망도 미리 가슴을 달궈 놓은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법이다. 서울광장에 자리 잡은 희망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희망의 외침이 아니라,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캐어낸 희망이고, 이미 밑바닥에서 달궈지고 달궈진 희망이다. 이 희망의 목소리가 모인 2012년 봄 서울광장은 노동자로서의 우리의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는 과정의 흔적으로 역사의 결 위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발걸음은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지극히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아픈 상처를 달래주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게 하는 자리로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견뎌냄 그 자체가 희망이 되는 것이라고….
바람이 찬 3월 서울광장에는 오늘을 견뎌내는 희망텐트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희망텐트에는 희망을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 희망텐트들이 모여 희망광장을 만들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광장을 지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봄이 왔지만, 마음도 바람도 추운 날이 계속된다. 2012년 서울에도 봄은 찾아오는가? 그 답은 바로 우리의 작은 관심과 따뜻한 애정의 발걸음과 목소리, 그리고 내가 또 다른 나와 '와락'할 수 있는 마음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