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이 올바를 때, 역사의 흐름은 퇴보하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는 언어들이 출렁이는 2012년, 온 지구를 가로질러 30여개국에 선거가 있다. 변화의 시기, 한 생각은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힘의 논리로 억압하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이어가고자 <오마이뉴스>는 세계의 지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통찰력을 빌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내면의 지혜를 깨우려 한다. 한 생명이 밝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2012' 인터뷰 시리즈는 그 노력의 하나다. [편집자말] |
로버트 서먼 교수는 서구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종교학자이자, 달라이 라마의 48년 지기로 오늘날 서구인들의 정신세계를 바꾸는 티벳 불교와 티벳인의 삶을 알린 주역이다. 할리우드 영화배우인 우마 서먼의 아버지로 문화계에서의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
그는 1941년 미국 뉴욕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혁명을 꿈꾸며 카스트로를 동경했던 청소년기를 거쳐 하버드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대부호의 상속인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 후 사고로 한 쪽 눈을 실명하며 그의 삶은 바뀌었다.
티벳어와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삶과 죽음의 근원을 찾아 23세에 인도로 갔다.
달라이 라마와 달라이 라마의 스승 밑에서 서양인 최초의 티벳불교 비구가 되었고, 다시 베트남 전쟁을 만나 중생 속에서의 변화를 꿈 꾸며 미국으로 돌아온다. 승단을 떠났지만, 가장 수행하기 좋은 장소로 대학을 선택하였으며, 하버드에서 학위를 마친 후 현재까지 콜롬비아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먼 교수의 강의는 콜롬비아대학에서 가장 듣고 싶는 강의로 꼽힌다.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듣고 삶의 트랙을 옮겨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타임>지가 1997년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으로 뽑혔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지도력을 미쳐왔다. 미국 국회 자문위원으로 출석하는 등 정치계에도 넓은 인맥을 형성한다.
지난 2011년 가을에는 '지배하라 운동'의 진원지인 월스트리트 쥬커티 파크에서 시민 연설을 하였으며, 그 영상과 전문이 세계적으로 회자되며 운동가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안으로부터의 혁명>, <티베트 사자의 서>, <티베트의 영혼 카일라스> 등 29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로버트 서먼 교수와의 만남은 지난 3월 8일 낮 12시 콜롬비아대학 근처에 있는 그의 맨해튼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인도에서 돌아와 미서부 일정을 마치고 온 지 이틀만에 다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한 달 출장을 떠나는 바쁜 그의 일정 속에서 마주앉게 되었다. 티벳인들의 분신 행렬이 이어지는 정세, 국제 평화에 앞장서온 그를 찾는 전화가 인터뷰 중간에도 각국에서 걸려왔다. 학자의 길을 넘어 평화의 시대를 도래시키고자 열정을 불태우는 그의 에너지가 화로같은 온기로 퍼져나왔다.
"선거, 폭로의 공간으로만 머물러선 안 돼"
- 맨해튼에도 봄이 왔습니다. 노란 튤립이 나왔더군요. '지배하라(Occupy) 운동'에 다시 나서기 좋은 계절이 됐습니다. "네. 이미 그들은 점령에 나섰죠."
-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교육예산 삭감과 등록금 인상 등의 현안과 맞물려 '주도를 점령하자(Occupy Capital)'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회와 여러 주의 정치인들이 자유발언을 허락하지 않는 법안을 만들어 더 강도 높은 공격을 해오고 있습니다. 곧 이에 대한 소송이 이뤄질 거예요. 저는 이제 '지배하라 운동'을 보다 미디어 쪽으로 개진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거를 염두에 두고, 과거 2000년도에 우리가 랄프 네이더와 했던 행동을 반복하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그때 우리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옳지 않으므로 투표를 거부하자고 했고, 제3의 당으로 가자고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덜 나쁜 악마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기에 새로운 길을 원했죠. 하지만 결과는 원치 않던 상황을 가져왔습니다.
과거의 역사에도 있던 일입니다.1932년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도 선거를 보이콧 하며 '저들은 모두 나쁘다. 우리는 절대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파시즘을 용인하고 히틀러를 불러들였습니다. 아버지 부시(전 대통령)의 행동으로 돌아가봅시다. 그는 미국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대통령인 클린턴은 그럭저럭 타당한 방향으로 진행했지만, 당시 그 두 정권이 다를 바가 없다는 급진적인 비판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 리버럴한 분위기에서 보다 기대가 커졌기 때문에 나타난 시대적 요구가 아닐까요. "한국도 지금 중요한 선거를 치르고 있지만, 존경받는 자유주의 활동가가 견인 가능성이 있는 세력에게 비판의 날을 세우고 일반 국민을 그들로부터 돌아서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런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자세야말로 권력을 조종하는 열쇠를 최악의 인간들에게 건네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냉소적으로 '둘 중에 좀 나은 악마, 차악(次惡, Lesser of Evil)'이라고 하는데, 이 말 뜻은 단순해요. '덜 나쁜 악마'라는 거죠. 선거에 참여해서 이 둘의 악마성을 밝히며, 사회를 보다 나은 쪽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선거를 포기해서도 안 되고, 선거가 그저 폭로의 공간만으로 머물게 해서도 안됩니다.
아들인 조지 W. 부시(전 대통령)는 공정하게 선거에서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두 번 다 (권력을) 훔쳤습니다. 타락한 선거였는데, 미디어가 진실을 밝히는데 소극적이었습니다. '지배하라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이제 선거를 깨끗하게 지키는데 앞장서고, 정치적 부정에 시민들이 연루되지 않도록 법제화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 지난 10년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미국의 경우 민주당이 우경화됐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이 자리를 굳건히 잡음으로써 오히려 민주당 안의 보다 많은 의원들이 과거 공화당 안의 자유주의적 성향의 의원들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지지층을 유지하며 안정을 추구하기에 가난하고 불안정한 이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세력은 위축되고 있다고 봅니다. "현재 진행중인 공화당의 오픈 프라이머리(공개된 예비선거)는 후보 각자가 역할 분담 속에서 쇼를 보여주고 있는 한 무리의 광대 쇼예요. 이들은 부자를 위해 세금을 없애려고 전력할 겁니다. 롬니가 추구하는 것이 그겁니다.
우리는 오바마가 리버럴 정책을 펼 때 '지배하라 운동'을 일으켰어야 했습니다. 오바마와 리버럴들이 2010년 선거에서 의회의 다수를 상실하기 전인 2009년에 '지배하라 운동'이 시작됐다면, 정책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덜 나쁜 악마'가 중요한 겁니다. 덜 사악한 악마를 유지시키는 것, 그 악마가 존재할 때 시스템을 바꾸는 '지배하라 운동'이 벌어졌어야 합니다.
저는 오큐파이 운동가들이 가난한 사람들, 갖지 못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미국 정부 안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있는 사회주의적 요소인 사회보장 제도를 없애려는 아주 나쁜 악마를 쫓아내도록 투표를 독려해야 합니다. 그 다음 오바마가 정책을 더 왼쪽으로 옮겨가도록 계속해서 압박하고 밀어부치도록 더욱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군중이 거리로 나와 행동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를 잃은 현대의 파시즘"
- 사회보장 제도를 지키고, 부자에 대한 세금을 늘리는 '지배하라 운동'이 더 살아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롬니와 같은 공화당 정권보다는 오바마를 이용해 힘의 추를 왼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지금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들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지사가 공화당 소속이거나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약 30개 주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흑인들이 제대로 투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법을 통과시켰거나 그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소득층 2000만 명이 투표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전보다 유권자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있어요. (유권자를 확인할 때) 사진 붙은 정부 발행 증명서만 허용하도록 해서 투표 체계를 까다롭게 바꾸는 거죠."
- 오전에 일찍 투표할 수 있었던 제도를 없앰으로써 출근 전 투표도 어렵게 하고, 투표 하는데 오래 기다리게 하려고 사인 추가, 주거지 확인용 쓰레기수거 영수증을 제시하도록 하는 등 투표를 제약하는 여러 법안들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체 유권자의 11%에 달하는 2100만명 가량이 정부 발행 증명서가 없다고 합니다. "(투표를 제약당한) 그들이 바로 가난하고, 나이 들고,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입니다. 부자나 중간 계급만이 투표에 참여하는 조건이 된다면, 오바마의 재선은 위험해지고,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겁니다. '지배하라 운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선거에서 힘을 결집하며, 거리를 점령해 오바마가 정유회사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 등을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과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공익사업을 펼치도록 해서, 사회 기반시설을 복구하고 고용이 이뤄지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미국은 현재 사회기반 시설이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진보 정책을 펼 수 있도록 혁신 작업을 벌여야 합니다."
- 주 정부들의 파산위기 속에서 교육 공공부문의 예산 삭감은 보편화 됐습니다. 공화당 계열인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는 복지와 사회 기반시설, 여성과 관련한 예산을 공격적으로 삭감해 대중들의 갈등과 사회적인 긴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 계열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 상위 소득자의 세금을 올리겠다고 발표하면서 공화당 후보들의 이후 행보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대한 정의가 바로 기업의 힘과 정부의 행정력이 하나로 될 때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선거는 허구인 거죠. 로비스트의 울림이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정치인은 기업으로부터 다시 선출되기 위한 선거자금을 지원받고, 기업인들이 행정부로 들어가는 것, 이게 바로 민주주의를 잃은 현대의 파시즘입니다. 파시스트들에겐 집권 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코스입니다."
"미국, 제국주의적 이익 한 번도 못 얻어"
- 미국을 일컽어 신제국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 침략을 주도하는 세력이라는 지적이죠. "미국은 제국주의적으로 한 번도 이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딕 체니(전 부통령)의 터무니없는 뉴밀레니엄 정복이라는 허영때문에 제국이 망하고 있죠. 이는 진정한 제국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제국주의라면 영국이 19세기에 부강했던 것처럼 더욱 일어나야지 이렇게 파산해서는 안 되죠.
미국은 이라크 침공에서 보여지듯, 석유 영업점 하나도 얻지 못한 채 그 전쟁 때문에 1조 달러를 탕진했습니다. 남은 것은 다시 이란으로 방향을 돌려 쿠르드를 방어하겠다는 새로운 시도이지만 불행하게도 수니파는 시아파와 전쟁을 벌일 것이며,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국주의적 계산으로 미국은 헛 돈을 쓰고 망하는 셈이에요."
- 지금 제국의 주인은 자본이기 때문에 그 주인만큼은 영원할 듯도 보입니다. "지금은 글로벌 테크놀로지컬 제국주의입니다. 군산 복합체가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은 거짓 사탕발림입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의 오너(자본)가 원할 때는 가끔씩 자신들의 날개도 스스로 꺽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국제적인 글로벌 기업 제국주의입니다. 이 제국주의는 지구의 자원을 다 벗겨내면서 엘리트 억만장자를 더욱 부유하게 키워냅니다.
그들은 지구적이고 어느 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회사 임원에게만 충성할 따름이며 심지어 그들의 주주도 더이상 살피지 않아요. 그들은 주주의 가치를 파멸시키고 회사를 문 닫게 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주주의 가치를 파괴하고 섬에 가서 숨는 일을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용인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파산하겠다는 처방입니다.
다행히 이제는 그 논리를 제대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보와 기술 때문입니다. 조나단 쉘의 <정복할 수 없는 세계>를 읽어보세요. '인간의 비폭력과 의지', 이것이 살아남으로써 제국주의는 막을 내리고 전쟁은 더 이상 가능성을 잃게되는 세상이 열립니다. 현재의 기업들은 사병과 용병을 갖고 있고, 정부를 자신들의 사적 자산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그 의도가 이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고,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도 스스로 온난화 기상이변이라는 증세를 일으키며 대항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곧 다가올 미래에는 진정으로 정부나 기업에 복종하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발 딛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해방을 일궈내야 합니다."
(☞ '깨어나자 2012 : 석학을 만나다 2-2'로 이어집니다.)
안희경 작가는 성신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방송 PD로 활동할 당시, 1998년과 2000년에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2002년 미국 이주 후 여러 매체에 미국의 시사 문화와 명상 트랜드를 다양하게 소개해왔다.
또한, 세계의 석학 및 현대미술 거장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예술을 뒷받침하는 근원적 삶의 자세를 드러내 진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의 환경을 지키는 책 <우리가 머무는 세상>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