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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2012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큰 영애 시절, 청와대에서 새마을 지도자 표창자들을 접견, 다과를 베푸는 모습.
 큰 영애 시절, 청와대에서 새마을 지도자 표창자들을 접견, 다과를 베푸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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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통령은 박정희만 하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 박근혜는 그냥 박근혜가 아니라 '영애 박근혜'였다. '영애'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어린 나에게 '영애 박근혜'는 뭔가 범접하기 힘든 대단히 높고 존귀한 분이었다. 그때의 인상이 대단했던 모양인지 지금도 박근혜를 말할 때는 그 앞에 뭔가 존칭을 붙여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한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9년 10월 26일 다음날, 나는 왜 다른 급우들과 선생님들처럼 침통한 눈물이 나지 않는지, 그 나이에도 애국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을 심하게 책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철이 들고서 그때를 다시 돌이켜보면 쓴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순전히 박근혜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어쨌든 양친이 모두 암살의 희생자가 되었으니 '영애 박근혜'의 인생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와 함께 박근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신화로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에서 정확하게 지적했던, 박근혜를 볼 때마다 사람들이 느끼는 뭔가 "짠~한 마음"이, 젊은 시절을 박정희와 함께 보냈던 지금의 어르신들에게는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박근혜는 신화적 후광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놀라운 지도력으로 천막당사에서 한나라당을 구해냈고 이번에는 당의 이름과 색깔까지 바꾸면서 파산 직전의 집권당을 다시 되살려 놓았다. 본인의 그런 노력과 재능이 없었다면,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독신여성이라는 '퇴행적인 핸디캡'을 극복하고 현재 가장 유력한 대권후보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근혜, 무엇을 단절하고 무엇을 쇄신했나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비대위 전체회의에서 최근 당내 일각의 '비대위 흔들기'에 대해 "쇄신이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쇄신 자체를 가로막는 언행, 비대위를 흔드는 언행은 자제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비대위 전체회의에서 최근 당내 일각의 '비대위 흔들기'에 대해 "쇄신이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쇄신 자체를 가로막는 언행, 비대위를 흔드는 언행은 자제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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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박근혜를 볼 때마다 나는 만약 박근혜가 정말 여권의 공식적인 대선후보로 선거에 나선다면 그 파괴력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자). 그런데 나의 이런 '기대감'에 비하면 지금 박근혜가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른바 '10·26 부정선거의혹' 뒤에 당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면서 전면에 나선 박근혜는 당명과 로고, 심지어 당의 색깔까지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며 쇄신과 개혁에 나섰다. 뒤이어 친이계 의원들을 '공천학살'하자, 국민들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쇄신에 높은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근혜의 쇄신은 분칠로만 얼굴에 묻은 얼룩을 감추는 이른바 '분식 쇄신' 혹은 '화장발 쇄신'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무엇과 단절하고 무엇을 쇄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친이계를 학살했다고는 하지만, 위키리크스 폭로에 따르면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정부훈령을 어김은 물론 쌀 추가협상을 약속했다는 김종훈(서울 강남을) 전 통상교섭본부장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주역 정운천(전주 완산을)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4대강 사업 전도사 김희국(대구 중남구) 전 국토해양부 제2차관, 2008년 KBS 후임사장 관련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김회선(서울서초갑) 전 국가정보원 제2차장, 작년 서울시의 무상급식 반대의 선봉에 섰고 최근엔 예전의 독도발언("독도는 분쟁지역 인정해야")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하태경(해운대 기장을) 등 쇄신이나 과거와의 단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후보들도 상당수다.

게다가 시중에는 "박근혜와 친밀하면 공천 확률 80%"라는 말이 떠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와의 단절이나 쇄신보다는 약간의 화장발로 야권의 정권심판론을 피해가면서 실제로는 자기 친위부대를 구축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명과 로고와 색깔을 바꾸고 몇몇 친이계를 내친 것은 정권심판이라는 소나기를 잠시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것이다.

이런 의혹은 선거전이 달아오르면서 더욱 커지기만 했다. 단절하고 쇄신하고 잘못한 것은 바꾸겠다고 했지만 정작 선거판에 나와서는 사상초유의 '야권심판론'을 제기했다. 말하자면 노무현 시절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 (이른바 '폐족'들이) 무슨 염치로 이제 와서 'MB정권 심판론'을 주장하느냐는 말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MB정권이 적어도 노무현 정권보다는 국정을 잘 수행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야당보다는 자신들이 국정을 더 잘 수행할 것이라는 새누리당의 자체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니까, 집권당으로서 MB와 함께 국정을 나름대로 잘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 터인데 이대로 심판을 받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 인사들이 한결같이 지난 노무현 정권을 물고 늘어지는 것(불법사찰 문제가 대표적이다)은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판단 하에서는 전 국민적인 반MB 정서나 정권심판론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결국 자기 자랑만 하고 있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4.11 총선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새누리당 홍사덕(종로), 정진석(중구) 후보 합동연설에 박근혜 중앙선대위원장이 찾아 후보들을 지원하며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4.11 총선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새누리당 홍사덕(종로), 정진석(중구) 후보 합동연설에 박근혜 중앙선대위원장이 찾아 후보들을 지원하며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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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에 대처하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자세는 떳떳하지 못하다. 전 정권이나 지금의 야당에 비해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심판을 받겠다고 나서면 된다. 우리가 집권 4년 동안 좀 모자라는 점도 있었으나 이전의 노무현 정권보다는 훨씬 더 잘 이렇게 나라를 잘 이끌어 왔으니 우리에게 계속해서 표를 주십시오, 하면 되는 것이다. 국회 절대과반을 장악하고 있는 책임 있는 집권당이라면 응당 이렇게 선거에 나서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박근혜가 늘 말하던 법과 원칙이 있는 큰 정치가 아니던가.

하지만 현실의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한편으로는 막연하고 애매한 쇄신으로 정권심판론을 피해가고(실제로 박근혜가 전면에 나서서 당명을 바꾼 것만으로도 충청권에서는 큰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도 없는 야당에게 의회권력을 맡기면 안 된다는 교묘한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반성하고 바꾸고 쇄신하겠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두루뭉술한 수준일 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발언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은 자기들이 잘했다는 얘기밖에 남지 않는다.

새누리당의 이런 기만적인 이중전략이 극명하게 드러난 예가 바로 지난 3일 있었던 MBC <100분 토론>이었다. 당시 새누리당을 대표해서 패널로 나온 조동원 홍보기획본부장은 야당 쪽 추궁에 "저는 모르죠"라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일관해 방청객과 시청자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에 정치 신인급 당직자를 내세운 것도 현재의 집권당으로서 비겁하고 무책임한 처사이거니와, 그렇게 조동원 본부장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새누리당의 진심이 더욱 고약스럽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었을 것이다. 적당히 물타기를 해서 불법사찰정국을 벗어나고는 싶은데, 자칫 사건의 실체를 깊게 파헤쳐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싫었던 게 아닌가. 그런 식으로 정권심판론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잘했다고 계속 주장하면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이번 선거판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점은 이번 총선의 최대 관심지역인 부산 사상을 지역구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들은 말은 안 하지만 박근혜 쪽에서 최연소 후보인 손수조를 이 지역에 공천한 것은 결국 문재인 때문임을 모두 알고 있다. 손수조의 공천으로 유력한 야권의 대권후보인 문재인으로서는 이겨도 그만이고 지면 큰 상처를 입는 선거가 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사상을에 관한한 지역주민들의 삶이나 지역발전을 우선에 두고 공천했다기보다 박근혜의 대선레이스를 최우선에 두고 공천했다는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를 위해서라면 지역구 하나쯤은 경쟁후보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해 내버려도 좋다는 뜻인가? 이것이 어떻게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집권당의 선택일 수가 있는지, 부산 출신의 유권자로서 심한 모욕감을 느끼는 건 둘째 치고,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설픈 분칠과 꼼수, 박근혜스럽지 못하다

앞서 말했듯이 박근혜는 한국사회의 보수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다(단점도 여럿 있기는 하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 지형상 야당의 지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보다 박근혜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한국정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박근혜가 조금이라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의 발전 관점에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한국의 보수가 건전한 보수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진보가 유능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조금 더 통 큰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 해서 나처럼 입장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역시 박근혜는 참 대단하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 그렇게 해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에게도 감동의 정치를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박근혜는 집권여당의 2인자로서 지난 4년 동안 한국사회를 이끌어 왔다. MB에게 핍박을 받았든 말든 그것은 그 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 국민의 눈에서 보자면 박근혜는 여전히 집권세력의 가장 유력한 일원이다. 그렇다면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번 총선에서 지난 4년간의 국정에 대한 심판을 받아라. 어설픈 분칠과 꼼수로 회피하는 것은 전혀 박근혜답지 못하다.

박근혜가 반드시 털고 가야할 문제, 과거청산

지난 3월 13일 부산 사상구에 출마한 손수조 후보 지원에 나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손 후보와 함께 차량에 올라 거리에 나온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지난 3월 13일 부산 사상구에 출마한 손수조 후보 지원에 나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손 후보와 함께 차량에 올라 거리에 나온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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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박근혜가 털고 가야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청산이다. 최근 박근혜는 "산업화 과정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지만 박정희 독재치하의 피해자들은 그 존재조차 인정을 거부했다. 이것은 비극이다. 독재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독재자의 딸이 대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공포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박근혜에게도 비극이고 한국사회 전체로도 비극이다.

한편으로 나는 현실 정치 감각이 탁월한 박근혜가 정수장학회나 군사독재 같은 문제를 대선용으로 남겨 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대권레이스에 나선 박근혜의 가공할 파괴력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박근혜가 장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핵무기급 폭탄은 전향적인 대북정책이다).

하지만 과거청산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고 그래야 그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덜 받는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는 지나가버린 세월이 아니라 오늘로 이어져 미래로 흘러가는, 끊기지 않는 강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일본에게 진심어린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의 보수가 존경받는 보수가 되려면 박근혜의 과거청산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박근혜가 오히려 뉴라이트 계열에 가까워지는 경향은 대단히 우려스럽다.(관련기사: 독도가 뭐라고? 박근혜는 정체를 밝혀라)

과거사 문제는 박근혜에게는 비극적인 가족사와도 연결돼 있으니 그 결단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쉬운 문제들부터 일단 과감하게 털고 나갈 수는 없을까? 우선 선거법 위반이 명백한 손수조 후보와의 '카퍼레이드'는 진솔하게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다. 야권의 임종석이나 이정희는 보좌관의 잘못 때문에 후보직을 내놓았다. 한국 정치에서 박근혜의 지위나 책임감이 이들보다 가볍지는 않지 않은가.

그리고 누가 봐도 그대로 갖다 베낀 것이 확실한 논문표절 후보 문제도 그 심각성과 책임감을 깨닫고 나서서 해결해 주기 바란다. 나 같은 일선의 시간강사도 베낌이 그 정도 수준이면 일상적인 과제물조차 0점 처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대학이다. 우리 정치와 국회의 품격이, 그리고 박근혜의 품격이 이보다 못해서야 어디 부끄러워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나.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번에 전말이 드러나고 있는 청와대 주도의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사건은 그 심각성과 위중함에 비해 박근혜가 지나치게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범죄로서 양대 선거와는 무관하게 청와대와 대통령에게 그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할 사안이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번 사건도 선거공학적으로만 접근해서 대선까지의 표계산을 앞세워 박근혜와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을까 솔직히 걱정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공화당 의원들이 앞장서서 닉슨을 탄핵했던 사례를 박근혜는 잊지 말기 바란다.


태그:#박근혜 ,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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