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던 문정현 신부가 지난 6일 강정포구 방파제에서 7미터 높이의 삼발이 아래로 추락했다.
"문정현 신부님이 강정포구 서방파제에서 떨어지셨다." 한 문장을 쓰고 십 분 넘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강정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라고 외치면서, 구럼비가 깨어지는 것이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픈 일이라면서 문정현 신부님이 시멘트 덩어리 위에서 손자뻘 해경과 몸싸움을 하다가 7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난 어디에 있었는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하늘이 내린 제주의 자연을 위해, 제주 해군기지 꼭 막아야 한다면서, 일흔을 훌쩍 넘긴 노 사제를 싸움의 맨 앞에 세워두고…. 나는 왜 그의 뒤에 숨어 있었는가?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에도,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을 미군기지 짖는다고 몰아낼 때에도, 용산참사로 다섯 명의 철거민이 불에 타 죽은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난 그저 그의 뒤에 숨어있었다.
인권도시를 만드는 일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도, 사형폐지 음악회를 준비하는 일도, 지난 3월 14일 강정의 푸른 밤 콘서트 출연진을 섭외하는 일도, 분명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그런데 난 왜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가? 문정현 신부님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할아버지 신부님의 허리뼈 마디마디가 부서질 때, 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난, 왜 강정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가? 왜, 오늘 제주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가 취소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는가?
신부님이 계신 제주대학교 병원에 찾아가더라도 신부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있을까? 그의 눈을 보며 괜찮으시냐고 물을 자신이 없다. "어서 일어나셔야죠" 하면서 웃을 수 없을까. 두렵다. 모두가 문정현 신부처럼 싸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각자 방식과 길이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다 '거리의 신부'가 될 수는 없다. 그래도 문정현 신부처럼 싸우는 사람이 100명은 있어야지, 아니 10명이라도 있어야지. 거리의 신부가 한 명만 있다면 거리의 목사, 거리의 스님, 거리의 학자, 거리의 변호사, 거리의 의사, 거리의 활동가, 거리의 화가, 거리의 음악가…. 한 명씩은 있었어야지. 40년 넘게 한 자리에 서서 흔들림 없이 누가 그처럼 싸워 본 적이 있는가? 다른 길은 없다. 문정현의 자리에서 싸울밖에.
덧붙이는 글 | 김덕진 기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