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개봉한 영화 <화차>의 '차경선'은 자신이 원하는 나이와 여건을 고루 갖춘 여성들을 표적삼아 남몰래 움직였다. 그녀, '차경선'이 점찍은 여자들의 우편물은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차경선의 표적 뒷조사의 시작은 바로 다름 아닌 '우편물 훔쳐가기'였다. 다른 사람이 되어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신이 택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조금씩, 조금씩 그 사람의 우편물을 손에 넣은 그녀 차경선의 행동에 뜨악했던 건, 짐작컨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원래부터 우편물에 민감하진 않았을 터… 민감해진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들어낸 어둠의 우편물 도둑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게다가 꽤 흥행했던 영화 <화차>의 차경선까지 세상에 태어나버렸다. 일단, 차경선 같은 허구의 인물에게 느끼는 두려움은 접어두고, 실제 생활 속 여러 유형의 우편물 도둑님들에게 비교적 차분히, 우려 섞인 부탁 메시지를 날려보고자 한다.
훔쳐가는 사람들대학 재학 시절, 학교 근처 다세대주택의 원룸에 살았다. 공동주택 세입자는 대부분 나와 같은 대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 부부가 깔끔한 성격인지라 늘 복도나 계단 등이 쾌적했다. 집은 내가 공부했던 학교와는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근처에 슈퍼나 맛있는 식당도 많아서 편리한 축에 속했지만, 역시나 먹고사는 동네가 다 그렇듯이 좀도둑이 없진 않았다.
층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깜빡해서 몇 시간 뒤에 가 보았을 땐 이미 몇 가지의 빨래가 사라져버리기도 했었고, 말리려고 복도에 잠깐 펼쳐둔 우산이 사라지는 일은 빈번했다. 그런데 제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우편물을 도난당하는 일이었다.
누군가 훔쳐간 그 우편물들의 내용은 자주 이용했던 대형마트의 현금쿠폰이라든지, 아니면 인터넷으로 신청했던 화장품 샘플, 정기구독하던 식물 관련 소형잡지 등이었다. 내 이름과 주소가 적힌 우편물의 겉봉을 뜯어서 그 내용물들을 획득하는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상상할 때면,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분노가 치밀었다.
빨래나 우산 같은 것들보다, 우편물을 도난당하는 일은 굉장한 상실감과 찜찜함을 남겼는데, 그건 내 이름과 주소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신상정보도 누군가에게 노출되었을 수도 있단 생각에서였다. 간혹 우편물의 겉봉투가 찢겨져 입을 벌린 채 공동주택입구에 나뒹구는 걸 목격하면,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을 정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째로 없어지는 것 말고는, 처참하게 찢긴 우편물에서 내 이름을 본 적은 없었다.
친구들에게서도 비슷한 사정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한 친구는 다년간 공동주택에 거주하면서, 세입자간의 신뢰가 많이 무너진 듯했다. 내가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려고 집주소를 물었을 때, 우편물이 없어지는 일들이 빈번하다며 공부하는 학교로 보내달라던 그 친구가 아직도 우편물 도난사건을 겪고 있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된다. 분명, 그 친구도 나처럼 감정이 분노로까지 치달았을 것이다. 아, 생각만 해도 괴롭다.
훔쳐보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의 서민들은 자동차 기름 값, 새로 산 자동차의 남은 카드 할부개월 수, 적금만기지급일, 저축예금의 이율, 부동산시세, 펀드수익률, 명품백의 가격과 같은 숫자 이외에도 세금, 공과금, 아파트 관리비 등의 숫자에도 민감하다.
숫자로 환산되는 돈의 가치는 각자에게 주어진 숫자를 보고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매겨진다. 그런데 최근 숫자로 인해 소소한 일상을 사는 아파트 주민들에게서 나타난 민감한 반응은, 재미있게도 남의 집 우편물 훔쳐보기였다.
"OO집은 도시가스의 가스비가 얼마가 나왔다더라.""다른 집보다 우리 집이 관리비가 더 비싼 것 같아."그렇다. 어쨌거나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주력 논쟁은 결국 '돈'이고 부족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다른 집의 우편물고지서를 우편함에서 꺼내 숫자를 확인하는 일 등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 가스비 고지서를 받아보던 날, 나는 괜한 보상심리에 사로잡혀 다른 몇 세대의 가스비 고지서를 꺼내서 숫자를 보고 도로 집어넣은 적이 한 번 있다. 그러면서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적은 우리 집의 숫자를 보며 스스로 감탄하는 정서행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나 역시 이전의 우편물을 훔쳐갔던 도둑이나, 다른 집 우편물 고지서를 훔쳐본다던 주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개탄했다. 말하자면, 내안에서는 내 행동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우편물을 훔쳐본다는 것이 용인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다른 주민들의 "좀 그렇긴 하지만, 매번 궁금해서 다른 집 것을 꺼내본다"는 발언을 몇 차례에 걸쳐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들의 상습적인 우편물 훔쳐보기가 대다수 주민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찜찜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은 얼마만큼의 금액인지가 궁금해서, 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기분을 망쳐 놓고 있는 게 그런 사람들의 행위인데, 나는 아무래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자. 괜히 훔쳐보는 일 하지 말고. 아, 돈도 중요하지만 기본은 지키자고요. 훔쳐보는 것도 도난이에요. 진짜 찜찜하다구요!'스마트한 대처법어쨌거나 도난당하는 우편물과, 도난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는 나의 우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웬만한 고지서는 이메일과 문자로 받아보고, 각종 정보지 같은 것들도 모두 이메일로 받는다. 대형마트의 현금쿠폰은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여 받아쓴다.뭐 이렇게 신문까지도 인터넷매체를 이용하면서 소통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완벽한 사생활보호가 인생의 목표인양, 비교적 스마트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남의 집 우편물을 꺼내가고, 또 몰래 들춰보는 사람들보다 우스워보이진 않을 것이다.
'이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어떤 스마트한 기술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삶에서 더 크게 작용했던 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기술이 스마트한 대처법이지만, 믿음이 스마트 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 지킬 건 지켜가며 그렇게 믿고 살아요. 간곡하게 부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