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1일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 전투 때 전사한 이우근(동성중) 학도병의 편지는 이미 널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날 학도의용군 71명은 국군 제3사단 후방 지휘소인 포항여중 건물의 경계 근무를 섰다가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공격해온 북한군에 밀려 48명 전사, 13명 부상, 10명 포로의 희생을 당했다. 전투가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정훈요원이 이우근 학도병의 품속에서 발견한 편지의 전문을, 제목을 붙이고 연과 행 구분을 하여 시처럼 읽어본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그럼…입대 2주만에 상륙작전 투입
학도병들은 포항여중 운동장에서도 그랬지만, 경북 영덕 장사 바다 앞에서도 많이 전사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적을 속이기 위한 양동작전이 펼쳐졌는데, 장소는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였다. 김재한(당시 17세)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760여 명의 학도병이 탄 화물선 문산호는 부산항을 출발해 새벽 4시 30분께 장사 해상에 도착했지만, 태풍 케지아호에 밀려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 해안 소나무와 문산호 사이를 연결한 밧줄을 타고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상륙하기도 전에 학도병 중에는 거센 파도 때문에 밧줄을 놓쳐 바다 속으로 사라지거나 총탄에 맞아 숨진 채 물속으로 추락했고, 포탄에 맞아 몸이 산산조각나기도 했다. 김재한은 '얼마나 처참했던지 80이 다 된 지금까지도 그때의 광경을 가끔 꿈에서 보고는 몸서리를 치곤 해'하고 증언한다.
이재근(당시 17세), 윤경호(당시 16세)도 이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139명이 죽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인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실종자가 발생한 전투였다.
윤경호는 경상북도가 펴낸 <나라를 구한 영웅 학도병>에서 '어린 학생들이 부두도 없는 해안에 소형 상륙용 선박도 한 척 없이 밧줄을 붙잡고 상륙을 시도했다는 것은 세계 상륙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군번도 부여받지 못한 학생들이 불과 2주도 안 되는 훈련을 받고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고 탄식했다. '오직 나라를 위해 순수하게 총을 들고 나선 어린 학도병들은 인민군의 시선을 서해가 아닌 동해로 돌리기 위한 작전에 목숨을 바쳤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15세 학도병, 김일성 승용차 노획1950년 10월 22일, 당시 15세였던 어린 학도병 임일재는 소대장 이하 10명의 대원과 함께 김일성 승용차 수색에 나섰다. 전날 사병 4명과 함께 포로로 잡힌 인민군 장교가 '일행을 살려주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면서 '청천강변 우측 기슭을 따라 상류로 4km를 가면 강변에 김일성 승용차가 있다'고 제보했기 때문이다.
임일재는 이 차를 끌고 가기 위해 밧줄로 묶기까지 하고, 타보기도 했다. 뒷날 전쟁 중에 사망한 미8군 초대사령관 워커 중장의 미망인을 위로하는 선물로 김일성 승용차를 지목한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이 차는 미국으로 보내졌고, 우여곡절 끝에 1982년 10월 22일, 노획했던 바로 그 날짜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일재씨는 1999년 1월 20일 김일성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는 경남 사천시 항공우주박물관을 찾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19세였던 유경재 학도병은 1950년 10월 10일 원산에 들어갔다. 곧 통일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북한 주민들도 한국돈을 받아주었고, 그래서 원산 비행장에서 도루묵을 사먹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80여 명 국군과 함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포로 생활 세 달째, 심천포 출신 박상조, 그리고 김종기와 함께 세 학도병은 탈출에 성공했다. 줄곧 굶으며 내려오던 중 경기도 문산에서 UN군 진영을 보았고, 거기서 런닝을 찢어 흔들며 다가가 신분증을 내놓으며 소속 부대인 2사단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간 곳은 대전형무소였고,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렇게 '억울한' 포로생활을 2년 6개월이나 한 뒤 1953년 6월 18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상북도 발행, 행정정책연구원 저술의 <나라를 구한 영웅 학도병>이 지난 17일 출간되었다. 6·25전쟁 당시 경상북도 지역 소재 학교의 학생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들의 기록과 구술을 바탕으로 424쪽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학도병 당사자들의 증언록을 정부기관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쟁 발발 이전에 입대한 사람은 학생 신분으로 입영했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는 제외했다. 어디까지나 '학도병'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출간 목적이기 때문이다. 또 증언록 출간을 위해 인터뷰한 학도병 생존자는 모두 48명이었으나 지면상의 한계 등으로 이번 책에서는 22명의 구술을 수록하지 못했다. 편집자는 '못다 실은 참전기는 다음 기회를 약속드린다'고 양해를 구했다.
<학도병>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기네스북에 오른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경험한 이석수 학도병(당시 15세), 1950년 10월 19일 가장 먼저 평양에 들어간 뒤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연변까지 쳐들어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한 박인병(19세), 외동아들의 자원입대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가 6개월 뒤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전투에만 몰입하였고 뒷날 대대장까지 역임한 후 퇴역한 조임묵(17세), "배가 고프면 피자나 라면을 먹지 그랬어요?"하고 되묻는 손자들을 보면서 백마고지 전투의 처참했던 상황을 돌이켜보는 류제명(18세), 인민군 나침반 하나에 의지해 묘향산을 바라보며 걷다가 지쳐 자살까지 결심했던 김달준(19세),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적군 상황을 유엔군 작전참모부에 전달함으로써 <대한민국 5천년사>에 이름을 남긴 양종택(14세) 등등, 참전 학도병 26명의 증언을 수록했다.
<학도병>은 또 포항중고, 동지중고, 포항해양과학고, 경주중고, 경주공고, 문화중고, 감포중, 산내중, 안강중, 김천농공고, 안동중, 풍산중, 한국
생명과학고, 영주제일고, 영천중, 군위중, 효령중, 의성공고, 청도군 모계중, 이서중, 풍각중, 고령중, 성주중, 칠곡 순심중, 울진중의 '학교별 학도병'을 수록하는 한편, 포항여중 전투와 장사 상륙작전 참가 학도병은 물론 육군본부 학도병의 명단, 최초 부여 군번, 재부여 군번, 출신학교까지 부록으로 수록하여 사료적 가치를 높였다. 특히 학교별 명단에서는 생존자의 현 주소 및 전화번호까지 수록하여 그들의 명예가 널리 받들어지도록 배려하는 편집을 선보였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발간사를 통해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자유와 평화가 얼머나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것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기를 기대하며, 호국정신이 경북의 혼, 경북인의 정체성 확립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이제 학도병 참전용사들의 평균 연력이 83세에 달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이렇게나마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