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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건 효자각
김주건 효자각 ⓒ 정만진

경북 의성군 안평면과 신평면을 잇는 작은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이 끝나는  길가 오른쪽에 정려각이 하나 서 있다. '김주건 효자각'이다. 이 효자각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1905년, 이 마을에는 김주건이라는 맹인이 살았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매우 강렬한 사람이었지만, 앞을 보지 못해 애만 태웠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마음만은 이미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이윽고 사경을 헤매는 상황까지 나빠졌다.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으로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도 못 보는 김주건이 갑자기 꿩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눈물만 흘리며 애를 태우던 김주건이 마침 변소에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훨훨 날아들더니 그의 품에 안긴 것이었다. 그는 하늘이 주신 약이라 믿고 그 꿩을 고아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 없어졌고, 병석에서 벌떡 일어서게 되었다.'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1909년, 나라에서는 김주건의 갸륵한 효심을 기려 산비탈 길가에 비각을 세웠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세워진 비각이니, 아마도 우리나라 안에서 정부가 세운 마지막 비각이 아닐까 추측된다.

 의성 군조 왜가리 (사진은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고분군 관리사무소 앞 안내판의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의성 군조 왜가리 (사진은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고분군 관리사무소 앞 안내판의 것을 재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신평면에는 나라가 식민지에서 해방되던 해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깊은 산골이므로 숲에서 살던 꿩이 마을로 내려와 효자 김주건의 아버지를 살린 이야기가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그 동안 없던 하얀 새들이 1천 마리나 무리를 지어 몰려온 것은 큰 강도 없고 넓은 들판도 없는 이곳으로서는 정말 알 수 없는 사건이었다. 바로 왜가리였다. 왜가리들이 중율리 바로앞 얕은 산에 하얗게 날아온 것이었다.

해방의 기쁨을 왜가리들이 미리 알았던 것일까. 이제 새로운 나라가 막 태어나려는 순간을 앞둔 5월, 왜가리들이 알을 낳기 위해 이곳 중율리를 그렇게 무리를 지어 찾아오다니! 나이가 100년 넘었고 높이가 30m보다 훌쩍 큰 소나무들 위는 온통 하얗게 눈이 내린 듯 아름다웠다.

매년 '왜가리 축제'를 여는 신평면

해마다 5월 말이면 이곳에는 '신평 왜가리 축제'가 열린다. 4월부터 5월에 걸쳐 왜가리들은 이틀에 한번 또는 3∼4일에 1개씩 모두 3∼5개의 알을 낳는데, 25~28일 동안 품어 새끼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그 뒤 다시 50~55일 동안 암수가 함께 기른다. 그러므로 5월 말의 왜가리축제 때는 부모 왜가리와 아기 왜가리들이 어우러져 하늘을 훨훨 나는 눈부신 풍경을 볼 수 있다. 의성군 홈페이지의 '왜가리 축제' 초대문을 한 번 읽어본다.

"해마다 오월이면 신평면 청학마을에서 새로 부화한 왜가리들의 힘찬 날갯짓과 면민들의 화합잔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일구어 온 삶의 터전에서 '청학 신선제'라는 주제로 제5회 왜가리 축제를 열고자 합니다. 꿋꿋하게 이 땅을 지켜 온 신평의 지킴이들이 펼치는 축제 한마당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많이들 놀러오셔서 천년의 신비, 전설의 청학기를 받으시고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왜가리 서식지인 중율리의 앞산
왜가리 서식지인 중율리의 앞산 ⓒ 정만진

2011년에는 5월 28일에 왜가리 축제가 열렸다. 행사의 주된 장소는 마을 안에 있는, 1948년 9월 1일 개교해 2012명이나 되는 졸업생들을 배출한 뒤 2007년 3월 1일에 문을 닫은 중율초등학교의 폐교 부지였다.

올해는 5월 28일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전통혼례, 박 터뜨리기, 전통 향토음식 전시, 도립 국악단 공연 등의 1부 행사 '청학과 함께'가 진행된다. 이어 오후 1시 20분부터 오후 3시까지는 물고기 잡기 체험, 새끼 꼬기 등 전통기능 경연대회로 이뤄지는 2부 행사 '백학과 함께'가 펼쳐진다.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려면 포털 누리집에서 '왜가리축제'를 검색하거나, 신평면 면사무소(전화 054-830-5363)로 문의하면 된다.

왜가리는 철새, 축제 기간 방문이 절정

왜가리는 철새이므로 다른 계절에 가면 중율리에도 마을앞 숲에도 그들은 없다. 그러나 왜가리들이 가고 난 뒤에도 폐교 동남쪽 자그마한 동산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빛을 잃지 않고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나무들 사이로 동산 안에 들어가 보면, 220년 된 노거수들이 하늘을 온통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든 가운데에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다. 정자 주변에는 이곳이 마을 사람들의 쉼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시와, '이 나무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원이므로 다 함께 보호합시다. 의성군수'라는 팻말도 보인다.

오래된 나무들이 이렇듯 아름다운 둥치와 가지를 보이면서 곱게 잎사귀들과 그늘까지 가꾸고 있는 '마을 쉼터'는 좀처럼 보기 드물다. 그것도 평지가 아니라 작은 동산이니 그 멋진 품새는 더욱 격조가 높다. 아름다운 숲에 동화되어, 잠깐 동안이지만 아주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연'을 답사한다.

숲 안에는 문화재자료 402호인 석불 좌상이 있다. 고려 전기인 11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앉아 있는 돌부처는 비각 안에 모셔져 보호받고 있다. 불상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마을 쉼터'가 옛날에는 절이 있던 자리였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이렇게 멋진 자리를 사람들이 어찌 가만히 놓아뒀을까. 불상 비각 담장 앞 출입문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어본다.

"복련(覆蓮)이 새겨진 팔각대좌 위에 앉은 이 불상은 상호가 넓고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봉긋 솟아 있다. 두툼한 코와 약간 튀어나오게 새겨진 입모습 등 조각 지방 양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납의(衲衣)는 통견(通肩)인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왼손바닥 위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불상과 노거수
마을을 지켜주는 불상과 노거수 ⓒ 정만진

복련(覆蓮), 팔각대좌, 상호, 나발(螺髮), 육계, 납의(衲衣), 통견(通肩),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보주(寶珠). 어려운 한자어로 된 불교 용어들이 답사자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어떤 것들은 괄호 안에 한자를 밝혀두기도 했지만, 확실한 불교 신자이거나 이 방면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답사자가 아니면 그것도 대체로 소용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낱말들의 뜻을 모르고서는 안내판의 글이 무엇을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을 헛되게 이 자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며 답사여행을 하는 보람이 없다.

첫 문장을 단어 하나하나 따져가며 읽어본다. 복련(覆蓮)은 '뒤집어질 복(覆)'에 '연꽃 연(蓮)'이고, 팔각대좌는 한자를 밝혀놓지는 않았지만 아마  '여덟 팔(八)', '모서리 각(角)', '클 대(大)', '자리 좌(座)'일 것이다. 상호(相好)는 부처의 아름다운 용모(좁은 뜻으로는 '얼굴')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고, '소라(小螺)'와 '머리카락[髮]'의 뜻이 결합한 나발(螺髮)은 소라 모양으로 휘말린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가리킨다.

육계(肉髻)는 부처님의 머리 위에 상투처럼 솟아있는 살을 말한다. 따라서 '복련이 새겨진 팔각대좌 위에 앉은 이 불상은 상호가 넓고 나발이며 육계가 봉긋 솟아 있다'는 안내판의 문장은 대략 '연꽃이 새겨져 있는 팔각형의 큰 받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얼굴이 넓고, 소라 모양으로 휘감긴 머리카락에, 정수리에는 상투처럼 톡 살이 튀어 올라와 있다' 정도로 읽으면 되겠다.

둘째 문장도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읽는다. 납의(衲衣)는 '기워 입은 스님의 옷', 통견(通肩)은 '어깨로 통한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왼손은 배꼽 부위에 대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악귀를 쫓는 부처님의 자세'라는 뜻이다. 즉, '납의는 통견인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바닥 위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는 안내판의 문장은 '어깨에 걸쳐진 옷은 기운 자국이 뚜렷한데, 손바닥에 구슬을 얹은 부처님의 왼손은 배꼽 부위에 닿아 있고, 오른손은 땅에 닿아 있어 악귀를 쫓는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경상북도를 상징하는 새 '왜가리' 왜가리 한 마리가 숭어를 낚아채자 다른 왜가리가 이를 가로채려 하고 있는 광경. 사진은 박진관 영남일보 기자 저서 <새는 고향이다>(노벨미디어, 2011년)의 것임.
경상북도를 상징하는 새 '왜가리'왜가리 한 마리가 숭어를 낚아채자 다른 왜가리가 이를 가로채려 하고 있는 광경. 사진은 박진관 영남일보 기자 저서 <새는 고향이다>(노벨미디어, 2011년)의 것임. ⓒ 박진관

마을주민 909명... 의성군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면

이곳은 1479년 고두윤(高斗倫)이라는 선비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대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마을에 좋다는 나그네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동네는 죽리(竹里)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다시 1679년에는 김숙(金塾)이라는 선비가 그 이웃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개척했는데, 밤(栗)나무를 많이 심어 밤골(栗谷)이 된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두 마을에는 중율 1리, 2리라는 새 이름이 내려진다.

신평면은 인구가 909명밖에 안 되는 작은 면이다. 본래는 신평면의 땅이었던 안사 일대가 1990년 4월 1일 '면'으로 독립하는 바람에 의성군에서 (인구 수로는) 가장 작은 면이 된 것이다. 지금도 안사면을 합하면 사곡면, 춘산면, 가음면보다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신평은, 사람은 가장 적어도 가장 많은 왜가리가 사는 곳이다. 그뿐이 아니다. 5월말이 되면 사람도 '확' 불어난다. 아버지 어머니 왜가리가 새끼 왜가리를 데리고 훨훨 하늘을 날아다니는 산골을 찾아오는 이들이라면 아마 그들은 자연과 친하게 지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터이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말도 있지만, 5월 말의 신평은 왜가리처럼 깨끗한 새들이 노니는 곳에 백로 같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선경(仙境)이 되는 것이다.

 왜가리가 날아드는 신평면 중율리 앞 들판 일대
왜가리가 날아드는 신평면 중율리 앞 들판 일대 ⓒ 정만진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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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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