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갑상선 수술을 받았어요. 회사에서 빼빠(사포)로 가죽 가는 일을 6년 가까이 했어요. 수술을 받고 다시 출근해서 이제는 본드 제거하는 일을 해요. 하라는 대로 다 했어요."
노경순(52)씨는 첫 아이를 낳은 지 3년 만인 1999년에 직장을 얻었다. 등산화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노씨는 신발 갑피 가루가 날리는 좁은 공장에서 본드 냄새를 맡으며 묵묵히 일했다. 중국, 인도 등 해외산 등산화 시장에서 국산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루는 노씨의 아들이 수두에 걸렸다. 법정 전염병이었다. 평소에 맡기던 어린이집에서도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조퇴, 외출은 불이익을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 관리자가 평소 "회사가 먼저고 그 다음이 가정"이라고 한 말도 마음에 걸렸다. 회사직원들이 병원에 입원한 직원을 찾아가 사직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결국 노씨는 수두에 걸린 아이를 먼지 날리는 공장에 데려와야 했다. 정년퇴직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TV에 자신이 만든 등산화가 나왔다. 유명 영화배우 원빈이 신고 있었다. 자부심을 느꼈다. 등산을 가면 "우리 것이 좋다'고 회사 제품을 홍보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은 잊은 채.
74명 채용해 대통령 표창 받았지만 93명 정리해고
그런 사이에 회사는 K2상사에서 'K2코리아'로 이름을 바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2001년 매출액 257억 원에서 2011년 3637억 원으로 14배 가까이 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아웃도어 시장이 팽창했고, 회사는 국내 업계 3위를 기록했다.
회사는 주력을 등산화에서 의류, 등산용품으로 확장했다. 공장을 이전하고 반듯한 빌딩도 세웠다. 노씨는 빌딩 4, 5층 생산라인에서 묵묵히 일했다. 회사는 지난 1월 "경기불황에도 사무직원 74명을 채용했다"는 이유로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됐다. 대통령 표창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8일, 노씨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회사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생산라인을 인도네시아로 이전하고 생산직 모두를 정리해고하겠다'고 통보했다. '생산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이었다. 열두 달치 월급을 주고 명예퇴직 신청을 받겠다고 했다. 74명을 채용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회사가 93명의 생산직을 자른다는 이상한 계획이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정리해고 통보에 직원들이 뭉쳤다.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K2코리아 지회가 지난달 15일 결성됐다. 현재 회사는 노동조합의 반발로 정리해고에서 생산직 전환배치로 물러섰다. 회사가 제시한 고용보장안은 인도네시아, 개성공장, 행랑(A/S신청받은 제품을 파트별로 분류하는 작업), 신발A/S, 의류A/S, 의류검사, 신발개발, 직영매장판매 여덟 가지다.
하지만 노씨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가족이 있는데 인도네시아, 개성공장으로는 갈 수 없고, 오십이 넘는 나이에 매장 판매는 무리다. 나머지 A/S일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노씨는 "그동안 죽도록 부려 먹고 이젠 필요 없으니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등산화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 어딜 가라는 거예요? 못가요. 어떻게 일했는데... 억울해요.""13년 동안 100만 원 받아가며 일해왔는데 145억 원 배당?" "많게는 하루에 900개를 만들었어요. 신상품이 들어왔다고 야근을 했죠. 조퇴도 외출도 못가게 하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손숙자(52)씨도 노씨와 같은 해에 입사했다. 손씨가 만든 등산화는 평균 20만 원대다. 하루 900켤레를 넘게 만들지만 등산화 다섯 개 값이면 손씨의 한 달 월급이 나온다. 한 달에 21일을 근무하는 손씨와 그의 동료들은 매출 30억 원이 넘는 등산화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그에 비하면 손씨에게 쥐어지는 월급은 턱없이 낮았다. 13년 일했지만 한 달에 받는 월급은 직무수당 포함 1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민주노총에서 파악한 K2코리아의 재무상태를 보면 기업의 이익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이 2007년 79%에서 지난해 66.3%까지 떨어졌다. 특히 생산제조 인건비는 전체의 1.9%를 차지했다. 대신 당기 순이익은 2011년 586억 원으로 지난 2001년 13억 원에 비해 40배 넘게 올랐다.
K2코리아는 지난 2년간 주주들에게 145억 원을 배당했다. 그 중 74%는 정영훈 K2코리아 대표이사에게, 나머지 26%는 그의 어머니 성유순씨 외 관계자 4명에게 돌아갔다. 사실상 배당금 전부가 회사 대표에게 돌아갔다는 얘기다.
손씨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노조가 생기고 나서야 듣게 된 이야기였다.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죠.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13년 동안 100만 원 받아가면서 일해왔는데." 손씨는 "30대 후반에 들어와서 이만큼 회사 일궈놓으니까 돈 더 벌겠다고 우리를 내동댕이친다"며 회사의 생산라인 이전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미 8명 퇴직해... "화장실에까지 명퇴신청 안내문 내걸어" 이전 통지 과정에서도 회사는 집요했다. 손씨는 "정리해고 문자를 받은 다음날 생산부 4층 화장실에 갔더니 '명예퇴직 신청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며 "회사는 우리가 순순히 명퇴를 받아들일 줄 알았겠지만 우리는 끝까지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K2코리아 생산직 93명 중 70%는 40, 50대의 여성이다. 낮은 임금에도 주어진 대로, 회사에 순종하며 십 년 넘게 일해온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회사의 A/S부서로 간다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미 8명이 퇴직했다. 나머지 85명은 생산라인 폐쇄를 저지하며 5월 31일까지 매일 출퇴근 시간에 회사 앞에서 결의를 다지고 있다.
기자는 취재를 위해 23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K2코리아 본사 생산라인 출입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다. 건장한 보안업체 직원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대신 본사 1층 매장을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등산화가 눈에 띄었다. 노경순씨가 본드를 제거하고 손숙자씨가 마감했을 등산화일 것이다. 그 위로는 모델 장윤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매장을 나오니 생산부가 있는 4, 5층 유리창에는 이런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1년 이익배당금 100억 꿀꺽, 인도네시아 공장 웬말이냐."
"등산화 기능의 복잡화로 공장이전 불가피해" [인터뷰] 정용재 K2코리아 마케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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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23일 만난 정용재 K2코리아 마케팅부장과 나눈 일문일답.
- 생산부 이전과 관련한 회사의 의견은 뭔가? "생산 라인의 확대는 불가피하다. 등산화가 점점 기능이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생산라인에서 만드는 것은 다 재료를 만들어서 붙이는 과정인데, 전체 1/2에서 1/3의 공정을 하는 거다. 새로운 등산화들은 여기보다 더 큰 라인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전체 공정의 1/3 밖에 되지 않게 된다. 전체 공정을 소화할 수 있는 라인이 필요하다."
- 국내에 공장을 확장하면 안 되나? "회사는 400명의 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400명을 더 썼을 때 인건비도 인건비지만 사람들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400명을 새로 고용했을 때 향후에 또 라인을 늘리게 된다면 그때는 인건비 감당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생산라인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대안으로 전환배치 자리를 만든 것이다."
-10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들은 공장 이전에 불만이 크다. "생산부 직원들도 생산라인 폐지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다. 전환배치가 어렵다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다르다. 저희가 개별 면담을 통해서 해외로 못 가시는 분들은 8개 파트로 보낼 것이다. 인도네시아나 개성공단은 가족이 있는 분들까지는 가게 만들지는 않을 거다.
회사 처지에서는 인도네시아로 보내는 비용이 많이 든다. 인도네시아는 체류비와 숙박비, 주거비를 따로 지불할 예정이다. 숙소를 얻을 수 있게 매달 500달러를 지원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물가가 싼 편이기 때문에 500달러로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성도 외국은 아니다. 지방보다는 불편하지만 수당을 더 지급할 것이다. 개성 공단에 가면 월요일 오전에 들어가서 금요일 오후에 나올 수 있다. 교통도 다 지원한다. 평일에도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사유서를 쓰고 나올 수 있게끔 되어 있다. 회사에서는 최대한 배려하고 있는데 면담자체가 안 된다."
-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목소리가 많다. "조퇴, 외출, 결근 등의 규정은 총무부의 규정에 따라 시행한 것이지 억압적인 부분은 없었던 걸로 안다. 생산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생산 책임자가 심하게 대한 부분들은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다. 혹시 잘못된 부분들이 있는지 찾아서 내부 징계를 하겠다. 하지만 우선은 그것보다는 전환배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 근속 10년이 넘는 분들이 100만원 남짓 받던데 임금이 지나치게 낮은 것 아닌가? "지금 최저임금을 계산했을때 그 금액보다 약간 5만원 정도 많은 분들은 3, 4분 정도 된다. 나머지 분들은 남녀 평균 140만 원 이상 되는 걸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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