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사전에서 사라지면 좋은 단어를 뽑으라고 하면 그들은 무엇을 뽑을까요? 아마 '시험'을 꼽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12년 동안 우리 아이들은 단 하루도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몇몇 아이들은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생명을 끊기도 합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요즘 밤샘을 하며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밤을 지새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세대는 이른바 '당일치기'로 공부했는데, 지금 아이들은 몇날 며칠을 공부에 매달립니다. 안쓰러운 마음도 들지만 행여나 뒤떨어지 않을까 염려돼 공부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하기도 합니다. 중학교 2학년인 큰 아이가 지난 17일 학교에 다녀온 뒤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아빠, 읽어보세요."
"뭔데?""중간고사 시험감독관 지원서예요."
"시험감독관? 그래 지난해에도 학부모 중에서 시험감독관 지원자를 뽑았지."
"아빠 하실 건가요?""올해는 한 번 해볼까."만약 아이들이 커닝을 하면 어떻게 할까요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7년, 시험이라면 알러지 반응이 오기도 하지만, '한 번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내가 치는 시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시험을 치르는지도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가운데 가방을 올려놓고 시험을 쳤던 적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뒤에 앉은 친구가 얼마나 닥달을 하던지 커닝을 당(?)했습니다. 그 친구는 아예 대놓고, 보여달라고 했지요. 연필로 쿡 찌르면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계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를 높여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시험감독관을 지원하고 많이 설렜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 입장과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아이들이 만약 커닝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아는 문제인데 학생이 몰라 끙끙거리면 그냥 알려주면 안 될까?' 등과 같은 생각이 뇌리에 스쳤습니다.
"요즘 커닝하는 아이들 있니?""아직 커닝하는 친구들 없어요.""커닝하면 어떻게 되니?"
"빵점이죠. 그리고 혼나겠죠.""그래 커닝하면 안 되지. 아빠가 만약 커닝하는 아이들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당연히 빵점 처리해야죠.""선생님이 같이 들어가시니까.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다음은 아빠가 관여할 것은 아니지. 정말 기대된다. 아빠가 시험감독관도 다 하고…. 학부님들이 많이 오시니?""그럼요. 몇 번 들어오셨어요."27년 만에 경험한 중간고사... 조금 허탈했습니다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 학생들은 지난 25일부터 27일까지 중간고사를 치렀습니다. 25일은 3학년 학생들만 시험을 쳤고, 26, 27일은 전교생이 모두 시험을 봤습니다. 제가 시험 감독을 지원한 시간은 27일 4교시(오후 12시 ~ 오후 12시 25분)였습니다.
저는 잔뜩 기대를 안고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주감독관, 저는 부감독관이었습니다. 주와 부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시험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시험지 한 번 만져보지 못했습니다. 시험감독관을 지원하고 '아는 문제가 나오면 혹시 가르쳐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던 것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커닝하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맨 뒤쪽 의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몇 발 내딛다가 45분 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냥 45분 서 있다 끝난 시험감독관. 이렇게 할 것이라면 왜 학부모 시험감독관을 모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허탈했습니다.
물론 시험 문제를 푸는 아이들을 보면서 27년 전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끙끙거리면서 시험을 치렀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허탈감을 조금 메워줬습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 아이들은 시험지를 제출하고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함께 모여 풀이하면서 맞으면 환호하고, 틀렸으면 안타까워했답니다.
27년 만에 경험한 중간고사, 조금은 허탈했지만 작은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