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 전라도 장흥이다. 이 장흥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회진면이고, 이곳의 나루터를 '정남진'이라 불렀다. 정남진은 지금 장흥의 브랜드가 됐다.
회진면은 바다를 끼고 있다.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버티고 서 있다. 전형적인 한촌이다. 이 마을이 이청준 소설의 주된 배경이다. 그의 단편 <침몰선>과 <노송> <돌아온 풍금>의 무대였다. 장편 <흰옷>의 초등학교 여선생이 부임하고 떠났던 포구이기도 했다. <선학동 나그네>의 무대이기도 하고, 임권택 감독이 이를 토대로 만든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학의 향기 넘실대는 그 마을을 찾아간다. 장흥읍을 지나 자울재를 넘는다. 푸르름을 더하고 있는 남녘 바람이 달콤하다. 회진포구엔 바다에서 건져올린 감태가 봄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다. 따사로운 봄햇살에 감태가 물기를 털고 있다. 바다 내음이 신선하다.
지난 4월 26일. 여기에 오일장이 열렸다. 회진오일장이다. 장터는 평소 주차장으로 쓰이던 곳에 마련됐다.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 장이 선다. 회진장은 싱싱한 횟감을 구하려는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포구에 자리한 덕인지 갯것들도 싱싱하다.
해가 중천에 걸리면서 장터는 할머니들 차지가 된다. 새벽녘 혼잡스러움은 간 데 없고 벌써 한산해졌다. 여유롭게 장터를 돌아다니기에 좋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갑오징어가 제 철이다. 인근 바다에서 잡힌다. 5월 말로 가면 갑오징어도 한물 간다.
감성돔, 도다리도 회진장의 명물이다. "짐질이 있는 바다에서 잡아서 그런다"는 게 장터 사람들의 얘기다. 짐질은 바닷속에서 자라는 바다풀을 일컫는다. 봄볕에 꼬들꼬들 말린 간재미도 맛을 잔뜩 머금고 있다.
"된장하고 갖은 양념 해갖고 발라서 쪄먹으면 돼. 무시 좀 썰어놓고 매운탕 끓여 먹어도 맛이 기똥 차제. 양념을 쫘악 발라서 찌면 우리 애기들도 무지 잘 먹어."오는 주말 서울에서 내려올 자식들을 위해 간재미를 사러 왔다는 최씨 할머니의 말이다.
저만치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려온다. 눈길을 돌려보니 꽃게를 두고 실랑이가 한창이다. 꽃게가 11마리에 8000원이란다. 너무 싼 게 흠이었을까. 너무 싸서 혹시 상한 것 아니냐는 게 실랑이의 원인이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상인이 바로 칼을 들고 꽃게를 두 토막 낸다.
속살을 보고서야 실랑이는 일단락이 됐다. 그 옆에선 난장을 펼친 할머니가 담배 한 모금을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다. 칠순의 김씨 할머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낚시로 잡은 우럭과 돔을 담아왔단다.
"다른 것도 매한가지겄지만, 우럭은 막 잡은 놈하고 안 그런 놈하고 완전히 달라. 내 것은 새벽에 물봐온 거여. 가져가서 잡솨봐."햇살 좋은 길목의 담벼락 아래서 꾸벅 졸고 있는 할머니도 보인다. 할머니 앞에는 쑥과 달래, 냉이, 미나리가 놓여 있다. 그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무료해 하는 할머니한테 다가가 "하루 종일 앉아 계시면 심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말친구를 만난 듯 반긴다.
할머니는 "집에서 놀고 있으면 뭣해. 심심해서 나왔어.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단 낫지라. 집에 있으면 지옥이어라 지옥. 사람 구경할라고 나오제"라고 하면서 집에 갖고 가서 무쳐 먹으라며 냉이 한 움큼을 건넨다. 나물 값을 건네는데 할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는다.
"옛날에는 여그서 배도 타고 생일도, 고금도를 드나들었어. 장이 생기기 전부터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하고 미역, 바지락 같은 것을 폴고 허는 저잣거리였제. 여그가."장터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회진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장흥의 오일장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 이렇게 장의 역사는 짧아도 장터 사람들의 기억 속엔 '이보다 더 좋은 장'은 없었다. 목포, 여수, 부산 뱃길이 있을 때만 해도 남부럽지 않았다. '유명호', '태안호' 등 큰 배가 들어와 정박하는 날이면 장터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뱃길이 인근 노력항으로 옮겨지면서 회진포구는 조용해졌다. 장터도 덩달아 활기를 잃어갔다. 그렇게 장터의 영화는 뱃길과 운명을 같이했다. 시장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허름한 여객선 터미널만이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쩌것 봐바. 공사허고 있는 거 보이제. 5월이면 완공이 된다는디, 그 다음부터선 좋아지지 않겄어? 예전처럼 배가 많이 드나들고 사람들도 북적거릴 것이란 말여."부둣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기대가 애틋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