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신사역 1번 출구 계단. 성형 수술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의 변화 과정을 깨알같이 보여주는 광고 사진이 나붙어 있었다.
1번 출구를 나오면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플러스'가 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를 보기 위해 이곳에 들어섰다.
지구의 안보가 위협당하는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슈퍼 히어로들을 모아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의 블록버스터 <어벤져스>를 상영 중인 <브로드웨이 시네마> 한 켠에 자리 잡은 <인디플러스>.
그곳에서 노동자, 서민의 안전이 위협 당하는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싸워 온 슈퍼 히어로 '어머니'의 삶을 그려낸 <어머니>가 상영되고 있었다.
<어벤져스>. 2억2000만 달러의 제작비에 화려한 출연진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활약하는 대작이다. 명성에 걸맞게 개봉 4일 만에 100만 관객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4월 5일 개봉한 이래 4주가 지나고 있지만, 생소한 얼굴의 '어머니 히어로' 영화는 개봉 비용이 부족해 4월 말 현재 전국적으로 10곳의 극장에서 드문드문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토요일 저녁이었던 이 날도 객석에는 30명에 약간 못 미치는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여기 진짜 '어머니 히어로'가 있다
<어머니>는 속살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어벤져스>의 현란한 CG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단출한 화면 속에는 이소선 어머님이 '당당하게' 주무시거나, 몇 안 되는 이로 소박한 밥상에서 식사를 하시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뭔가 '정치적'이고 강렬한 노동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에 잠길만한 장면일지도.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은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냥 '어머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별명처럼 '노동자의 어머니'다.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혀가면 내가 시켜서 데모 나왔다고 해"라며 어린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던 품 넉넉한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영화 <어머니>는 이런 이소선 여사의 품 넓은 삶을 보여주는, 느리면서 따뜻한 영화다. 첫 장면에서 어머니의 곁에서 팔짱을 끼고 함께 천천히 걷는 여러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유난히 많았던 식사 장면들은 밥 먹으며 함께 사는 삶이 소중함을 보여 주려는 듯했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어머니>를 만든 태준식 감독도 "전태일 묘소 앞에서 따뜻한 햇살 아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고, 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소선 여사의 모습이 담긴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영화는 '함께 먹고 사는 세상'을 담고 있다. 배고픈 하소연들로 가득한 집회장에서 어머니는 만인의 어머니로 딸, 아들들을 토닥였다. 2600여 명이 해고되자 함께 살아 보자고 외치는 쌍용자동차 투쟁 현장에도 노구를 이끌고 가 작은 몸에서 작지 않은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과격'하게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다. 영화는 어머니가 걸어 온 '사람과 더불어 가는 삶'이 아름답지 않냐고 부드럽게 제안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정치력'이 있다.
이 영화, 상영 과정 자체가 '더불어 함께'다
영화는 기억을 만든다. 그리고 세상이 기억해야 할 가치들을 보존하기 위해 헌신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잊히지 않게 하고자 7648명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제작비를 대 1995년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담은 영화 <어머니>도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제작됐고, 개봉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더불어 함께인 세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상영 과정 자체가 '더불어 함께'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려면 나는 쌍문역에 내려 5번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이 버스는 전태일이 분신했던 그 무렵 어머니와 함께 살던 쌍문동 208번지(현재 쌍문동 삼익세라믹 아파트 자리)를 지난다. 이 버스의 종점은 한일병원. 어머니가 2011년 9월 영면에 드신 곳이다.
지난 4월 17일 한일병원에서는 '인간답게 살아 보자'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계약 해지된 식당 노동자들이 100일 넘게 투쟁해 고용 합의를 일궈냈다.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쟁취한 것.
한일병원 식당 노동자 송영옥씨는 <뉴스타파> 12회 방송에서 "정치인들이 사회를 바꿔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투쟁과 연대를 통해 하나씩 고쳐나갈 수 있다는 걸 느꼈다"며 "이젠에는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 조금 더 키울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말했다.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가 변했다. 유별난 히어로가 아닌 낱낱의 민중들이 세상을 바꾼다. 지구를 구하는 공상의 영화가 아닌 한숨만 늘어가는 현실의 우리 삶을 위한 영화 <어머니>를 더 많은 이들이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거친 사회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영화 <어머니> 공식 누리집(http://blog.naver.com/docusosun)에 들어가면 상영 정보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