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6년 동안 지식과 추억을 쌓았다. 그에 비례해 빚도 차곡차곡 쌓였다. 약 3000만 원.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탓에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입학하자마자 학원 강사로 일했다. 빨리 직장을 얻어야 했다.
정혜정(가명, 25, 서울시 동대문구)씨는 지난 18일 K출판사로부터 "합격했으니 5월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 모든 게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희망에 부풀었다. 출판·편집 쪽 경력이 없는데도 합격했다는 사실에 정말 기뻤다. '출판사 편집자로 취직하게 됐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어느 출판사인지 여쭤 봐도??' 'K출판사예요. 예전에 ○○○이랑 ○○○, ○○○ 같은 책 나왔던.'유명 서적도 여러 권 펴낸 진보 성향 출판사였다. 출판학교나 문화센터의 교육과정을 수료하지 않고 혼자 1년쯤 준비한 끝에 일군 성과라 자랑스럽기도 했다. 좋은 소식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튿날 '해고' 통보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19일 오후 5시쯤 혜정씨는 '메일을 확인해 보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회사였다. 메일함에는 '채용을 취소한다'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트위터에 올린 글이 채용을 취소하게 된 이유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K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다시 생각해 봐 달라"고 부탁한 뒤 1시간 후 또 연락했다. 한 번 더 부탁했다. "마음을 바꿔주실 수 없냐?"고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트위터 때문에 합격 하루 만에 취소... '채용이유=해고사유'?자신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면접 당시에는 '녹색당원이고 생태주의 관련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더니 '생태주의·페미니즘에 관심 많고, 소신이 뚜렷하다'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관련 지식과 경력이 부족한 자신이 합격한 이유가 '평소 생각'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 '평소 생각'이 하루 만에 '해고사유'가 됐다.
황당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지인에게 하소연했다. 쌍용차 등 해고노동자 문제에 관심이 많아 노동법을 잘 아는 그는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부터 근로기준법에 저촉되는 데다 구두계약만 해도 고용자-피고용자 관계가 성립하는데 다음날 취소하는 것은 해고"라고 했다. 지인은 정씨가 K출판사 합격으로 일하던 학원을 그만 둔 것도 보상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날 사측과 논의하고자 그와 출판사를 방문했다. '나가라'는 말만 듣고 돌아섰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출판업계 고질병이었다. 알아 보니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며 채용이 곧바로 취소된 사람도 있었고, 종교 문제로 출근 다음날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문제의식에 공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20일 정씨는 트위터에 'K출판사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글을 올렸다. 블로그도 새로 만들어 이번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하루 만에 300명 넘는 사람이 그의 글을 리트윗했다. 1만 명 가량이 블로그를 방문해 관심을 보였다. 서너 명 정도 '힘내세요' 응원해 주고 끝나겠지 예상했는데, 크게 빗나갔다.
누리꾼들의 관심이 쏟아지자 K출판사에서도 같은 날(20일) 공식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반박했다. 하지만 사측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자 이튿날 사과문을 올렸다. 출판사는 이 글에서 '정씨와 독자 여러분에게 죄송하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태의 원인을 정씨에게 돌린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출판사는 21일 다시 사과문을 올렸다. 앞으로 노조 결성을 보장하고, 직원을 채용할 때에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겠다고 했다. 사규를 만드는 등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실천 경과는 홈페이지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혜정의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트위터·블로그 여론 뜨거워져 "출판노동자 최초의 승리" 일궈 2차 사과문이 올라온 지 3일 후, 정씨는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출판분회 간부 1명, 노무사와 함께 K출판사 관계자 2명을 만났다. 사측은 계속 "큰 상처를 드린 것 같아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30분쯤 논의한 끝에 합의가 이뤄졌다.
안타까웠다. 원하는 일터이기도 했지만, 직장을 구하는 것 자체가 정씨에겐 절박했다. '안 되면 말고'가 아니었다. 그 마음으로 구직활동을 했다가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한순간에 뒤집어진 상황이었다. 연봉이 아닌 피해보상 협상을 하고 있는 현실이 슬펐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사태 해결을 도와준 언론노조 출판분회 회원들도 대부분 부당해고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사측에 문제제기하고 퇴사한 사람들은 이전 직장의 취업 방해로 1년 가량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출판노동자들 최초의 승리"라며 협상을 마친 정씨를 축하했다.
출판업계는 영세사업장이 많다 보니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곳은 상당수이지만,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곳은 찾기 힘들었다. '진보'는 여전히 삶이 아닌 상품이었다.
출판사 대부분이 5인 미만 사업장이어서 법적 보호도 받기 어려웠다. 대개 부당해고 문제는 고용노동부 산하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된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예외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법적 소송은 개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정씨는 감당하려 했다. 출판업계의 노동현실을 공론화하고, 누구나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선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표현의 자유' 고민한 계기... '인권 보호' 모르는 언론에 실망'표현의 자유'를 사회적으로 고민해볼 기회라고도 여겼다. 트위터에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정씨는 믿어왔다. 하지만 지난 열흘은 그런 믿음의 위기였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쓴 글을 몇 번씩 지우곤 했다. 말 한 마디가 무서웠다. 그럼에도 '트위터만 보고 해고하는 게 정당한가'라는 새로운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 자체가 좋은 일로 느껴졌다.
한편 직접 겪은 언론은 실망스러웠다. 정씨의 트위터 아이디(ID), 사진 등 개인정보를 여과 없이 보도한 매체가 여러 곳이었다. '정혜정'이란 한 사람을 보호하려는 언론사는 찾기 힘들었다. '보도를 원하느냐, 실명 또는 익명 보도 중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했던 한두 매체의 '당연한' 질문이 고마울 정도였다.
아주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던 날들이었다. '예비 편집인'에서 정씨는 '대학생' 신분으로 돌아갔다. 채용 통보 후 시험 대신 과제물을 제출하기로 했던 수업 담당 교수님들도 찾아뵈어야 한다. 대부분 수시 채용을 하는 출판업계 특성상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렵다. 다시 '절박한 구직자' 신분으로 8월 졸업을 준비해야 한다.
평범한 20대들이 진솔하게 제 이야기를 담은 소책자를 시리즈물로 만드는 날을 정씨는 꿈꾼다. 행여 이번 일이 그 꿈을 방해하진 않을까 상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힘없는 20대 구직자'일지라도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볼 수 있었다. 트위터 때문에 합격 하루 만에 해고당했다가 가까스로 사측과 합의를 이룬 과정이 그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그 교훈에 기대며 정씨는 오늘도 원서를 쓴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책'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인쇄소에서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