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지금껏 '옳다' '그르다' '슬프다' '기쁘다' 하여온 것은 결코 자기의 지의 판단과 정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전습을 따라 사회의 관습을 따라 하여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옳다 하니 자기도 옳다 하였고 남들이 좋다 하니 자기도 좋다 하였다. 다만 그뿐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옳다 한 것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남들이 좋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게는 내 지가 있고 내 의지가 있다. 내 지와 내 의지에 비추어보아 '옳다'든가 '좋다'든가 '기쁘고 슬프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면 내게 대하여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보고 그것을 내어버렸다. 이것이 잘못이다.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 이광수 『무정』 중에서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중세와 근대를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개인이 존재하는 가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사회다. 중세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광수가 말하듯이 중세의 사람들은 "온전히 전습을 따라 사회의 관습을 따라 하여온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근대는 다르다. 개인, 즉 '나'가 드러나는 개인의 사회다. 이광수는 바로 개인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이 '나'가 드러났기 때문에 <무정>은 한국 근대소설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이광수는 전습과 관습을 따라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행과 관습을 따라 남들이 닦아놓은 편한 길을 선택한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그것을 따라하기에만 급급하다.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보고 그것을 내어버렸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남들이 다 가는 대학이기 때문에 대학은 반드시 가야했고, 남들이 다 대기업에 가야하기 때문에 대기업만이 답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이광수는 <무정>을 통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은 아니었지만 조선이라는 전습과 관습을 부정하고 탈피하려고 했다. 우리도 이광수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대한민국은 옛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분명히 우리는 근대에 살고 있음에도 중세적인 행동들을 보인다. 내가 옳다 하는 것도 사회라는 공동체가 아니라고 하기에 숙고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내다버린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없이 남들이 편하다고 말하고, 쉽다고 말하는 길을 가려고 죽을힘을 다한다. 의사, 변호사, 공무원, 교사 등 자신에게 맞지도 않으면서 단지 편하고 안정적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떼를 지어 몰려간다. 이런 행위들은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라고 말한 이광수의 한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지금 우리는 '나'를 알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모든 사람마다 각기 다른 내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내면에 따라 고유한 개성을 외면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사회적인 구조에 의해 거세되고 규격화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나'라는 내면을 억압하도록 만든다. 이광수가 <무정>에서 옛 조선을 부정하고 경멸한 것처럼 우리도 이제 우리를 거세하고 규격화하려는 사회를 부정하고 경멸해야 한다. 결코 순응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파헤치고 뒤집어엎어서 발견하고 표출해야 한다.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살리고 나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