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고추장에 찍은 두릅나물 향. 된장에 무친 시래기나물. 8년 묵은 된장에 싸 먹는 상추쌈. 막걸리 한 사발에 풋고추 한 입. 여행자를 부른 주인장 농부의 멋과 맛을 만끽하는 순간입니다.
막걸리 몇 잔에 얼굴이 좀 불콰해졌나 봅니다. 김일섭 상임대표가 여행생협 공동대표를 수락해 줘서 "고맙다"고 하자, 주인장은 너스레를 떱니다. 공식 요청을 해야지, 수락하지 않겠냐는 것. "따르시오, 받으시오" 권주사(가)를 주고받듯 멋을 부려 보자는 것이지요. "청합니다", "수락합니다" 문답이 이어집니다.
여행생협은 지난해 9월 추진위를 설립하여 준비 작업이 한창입니다. 올해 12월 협동조합기본법 발효에 맞춰 창립할 예정이죠. 기존 생협보다 훨씬 수월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추진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원진이 수시로 모여서 사업을 논의하고 있죠. 월 1회 정도는 여행도 다니고요.
한살림 유기농 생산자공동체가 있는 외암(민속)마을, 몸·마음 수련을 하는 지리산 밝은마을, 세밑 강화도 해넘이·해돋이, 봄맞이 남도 매화마을과 순천만, 봄나물 캐러 강원도 횡성, 그리고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짓는 장수군 명덕리 전희식 공동대표 집까지 여행이 이어졌습니다.
"청합니다" vs "수락합니다"물론 여의치 않습니다. 협동조합 설립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조직을 지속가능하게 할 수익성을 확보할 방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서죠. 그 고민에는 여행 소비자와 시설공급자 사이에서 협동 조합의 주요기반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이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지금까지 정리한 여행생협의 위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먼저, 여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 몇 가지입니다. 첫째, 자연환경·생태계를 파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현지인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여행비를 공정하게 지불하되, 그 돈이 재벌·대기업이 아닌 현지인에게 흘러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롭고, 창조적인 여행을 하자는 것이죠.
여행생협은 ▲여행자와 방지기가 소통하는 협동여행 ▲도시(소비자)와 농촌(생산자) 협력하는 품앗이여행 ▲현지생산물을 제값 주고 사용하는 공정여행 ▲현지문화를 존중하고 배우는 체험여행 ▲영성 수련·회복의 재창조여행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생태여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행생협이 추진하는 여행 종류는? 먼저 농촌·산촌·어촌·도시 체험여행을 통해 해당 지역 문화역사를 배우고 익히며, 현지인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이웃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두레·품앗이 여행(일손돕기·직거래 등)으로 농촌·어촌·산촌 일을 거들고, 질 좋은 생산물을 구매하며 김장·된장 등 전통음식을 배우고 직접 담그는 것입니다.
아울러, 명상·휴양·수련여행으로 일과 삶에 지친 이들에게 휴양을 요합니다. 몸과 마음 아픈 이들에겐 치유를 줍니다. 삶과 업무 의욕을 높이는 재충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또 멋과 맛을 찾는 충전여행으로 전통(또는 지역 특산, 또는 유기농)의 건강한 먹을거리와 현지의 고유한 멋(한지, 짚공예, 염색) 을 찾는 여행을 하겠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생협은 민주·평화 등 인류보편의 가치를 전파하는 여행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국가·지역 전쟁 또는 분쟁지를 오가며 평화메시지를 읽고 전하며 난민촌이나 현지 실상을 깨닫고 알리며 동서·종교·남북·종족 갈등을 중재·해소하는 선한 이웃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지요.
"남자는 가로로, 여자는 세로로 자랬더니..."
다시 명덕마을. 현지의 구수한 맛에 생막걸리까지 곁들여 마시고 한참을 이야기꽃 피우는데, 어느 사이 자리를 떴던 '뚜란'(추진위원)님이 거무스레한 것을 한 쟁반 들고 나타납니다. 쑥개떡입니다. 방문자 일행에게 장수 읍내 어디선가 찾아오라던 것이 이 떡 재료였던 것입니다.
일행의 내방을 명덕리의 밤도 반기는 걸까요? 휘영청 밝은 달빛, 환하게 빛나는 남덕유 서남자락의 계곡 그리고 멀리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육십령 고개가 유혹합니다. 달밤 풍광을 맘껏 즐기라고 마당에 화롯불을 피웠습니다. 연탄 보일러처럼 생긴 것을 개조한 것인데 써보니 괜찮은 물건입니다.
불을 피우다 말고 달빛이 고와서 집 주변을 이리저리 탐색하는 데,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오릅니다. 달이 뿜어 내는 강한 음기 탓이었을 겁니다. 기자와 일행 한 명이 계곡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2Km 정도는 올랐을 겁니다. 간간히 보이는 민가, 개짓는 소리가 온 계곡을 진동합니다. 도로의 끝.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얀 밤이었습니다. 지리산 종주길 같습니다. 토끼봉을 지나 어디쯤일까. 총소리가 요란합니다. 북쪽 능선엔 빨치산 부대가, 남쪽 능선엔 광주 도청을 사수하다 퇴각한 시민군이 보입니다. 희한한 상황에 '어리벙벙'해 하다 화들짝 깨어났습니다. 희미해져가는 화롯불을 뒤로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뚜란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니, 남자 둘은 가로로 자고, 여자 둘은 세로로 자라고 했더니…. 전부 가로로 잤네. 말을 잘 안 듣네." 잔소린지 연설인지, 문을 활짝 열고 한 번 들여다보더니 다시 닫습니다. 옆자리를 보니, 김일섭 대표는 안 보이고, 나머지 분들만 취침 중입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 뒤편에 있는 주인장의 산(텃)밭을 구경했습니다. 200평 남짓. 밭에는 각종 채소가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습니다. 텃밭에 물을 주려고 수도 시설을 해놨습니다. 찬물을 한 바가지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일행은 아침 계곡산책에 나섰습니다. 둘은 오르다말고, 길 옆에 그림처럼 단장해 놓은 민가를 구경하겠다고 들어갔습니다.
달밤 육십령 고개 유혹에 그만...나머지는 계곡을 올랐고요. 취기 속 달밤에 봤던 그 길입니다. 선연한 기시감(?) 속 어딘가를 헤매는 착각에 머리가 묵직해 옵니다. 목젖 너머 진한 탁주 트림이 숙취에 더해 아침 상쾌함을 반감합니다. 심야 어렴풋하게 봤던 계곡길. 거길 다시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퇴비를 깔아놓은 밭에 여기저기 고사리 순이 돋고 있습니다.
일행이 한줌 정도 고사리를 꺾었나요. 좀 이상하다 싶어 둘러보니, 퇴비가 아닙니다. 가을에 그대로 쓰러져 마른 고사릿대들입니다. 곁의 서너 개 밭이 다 그렇습니다. 예쁜 잎이 하나 둘 피어나고 있습니다. 논을 묵혀, 고사리 밭이 된 것으로 판단했는데…. 혹시 몰라 고사리 꺾기를 중단하고 내려왔습니다.
주인장한테 물어보니, 고사리 밭이라네요. 세상에,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에고, 이를 어쩐담 주인이 누구신지 모르나, 지면으로나마 용서를 구합니다. 아침부터 '뻘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속은 쓰린데…. 일생 속내(?)를 모를 리 없는 혜정씨 기막힌 해장국을 끓여놨습니다. 둘이 구경갔던 집에선 참나물도 한 아름 가져왔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쭈뼛쭈뼛 들어서니 주인장 아주머니가 어서 오라고 반기며 집을 구석구석 구경시켜주고 마침 수확 중이던 참나물을 두 봉지나 싸줬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여행자를 반기려고, 새로 지은 펜션이었고요. 홍보를 좀 많이 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네요. 그럼 그렇지, 온통 꽃에 여느 집과 좀 다르다 싶었지요.
<다음 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