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살기 참 좋아진 세상이다."여성들이 읽으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발끈할지도 모르지만, 92년을 사시다 지난 1월에 운명하신 어머니가 언제부터인가 혼잣말로 자주 하시던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말이 단순히 제 어머니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선의 딸과 조선시대의 며느리로 살다 작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 여성들이 느끼는 격세지감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독 제 어머니만 여성의 입장에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식인 제가 보는 어머니,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도 많이 변했습니다. 어렸을 때 봤던 어머니는 책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조선 시대 여성이었습니다. 사는 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사고방식조차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주장하던 '여자'는 시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에게 복종하며, 자식 많이 낳아 잘 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를 이어야 하니 아들은 꼭 낳아야 했고, 한 번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돼야 하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니 여자의 목소리가 울담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발과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깨지기 쉬우니 함부로 집을 나서서는 안 되고, 남자가 가는 길을 여자가 가로질러도 안 됐습니다. 누워있거나, 뻗고 있는 남자 다리를 훌떡 훌떡 넘어다니면 재수가 없으니 절대 그래서도 안 됐지요. 당신도 여성이면서 여성은 참고, 양보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변하기 시작한 어머니... 이게 바로 격세지감
그러던 어머니가 나이 70이 넘으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에게 면허도 따라고 했고, 나이를 더 먹으면 힘들어지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놀러(여행)도 다니라고 했습니다. 딸들이 찾아와 푸념하면 "그렇게 속 썩으며 사느니 차라리 혼자 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80세가 넘으면서 아들이 없어도 된다고 하시더니 언제부터인가 "아들보다 딸이 더 좋은 세상"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책을 통해서 알게 됐던 여성들의 모습과 가치관은 그리 긴 세월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많이 변했습니다.
강명관이 쓰고 휴머니스트 출판 그룹이 발행한 <그림으로 읽는 조선여성의 역사>는 그림과 설명으로 돼 있어 이야기나 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보다 조선 여성의 역사를 훨씬 더 실감 나게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여성들을 옭아맨 '성리학'<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는 고려 후기부터 여성을 조명하기 시작합니다. 고려 시대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고, 조선 시대의 여성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가늠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장으로만 구성돼 있는 책들은 시각적 자료의 결여로 사실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림으로 읽는 조선여성의 역사>는 조선 시대의 여성들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과 그림 내용, 배경을 알려주는 설명이 들어가 있어 마치 시청각 자료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하는 게 아니고 남자들이 처가살이하던 고려 시대, 상속권이나 사회적 활동도 차별받지 않던 고려 시대는 어쩌면 오늘날보다도 여성들이 더 존중받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성리학이 국가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여성들은 남성에게 복종하고 남성에게 종속되며 인생이 속박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소학>은 유교적 가부장제를 염원한 남성-양반에게 여성에 관한 기본 인식을 제공했다. <소학>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그 주장에 따르면, 여성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남성에게 복종하는 존재,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였다."(본문 38쪽)"요컨대 유교적 가부장제는 성적 대상자로서의 여성에 대해서는 성적 종속성을 '절(節)' 혹은 '열(烈)'이라는 윤리로 요구하는 한편, 나이 든 어머니인 여성에게는 '효성'을 바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효양(孝養)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절부·열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다."(본문 42쪽)책은 조선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시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와 미인도, 연회도와 계회도, 풍속도 등이 실려 있습니다. 독자는 조선 여성의 역사를 그림을 감상하듯, 실록 혹은 고전을 읽듯 머릿속에 새길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모습, 이런저런 잔치를 하는 모습, 나물을 캐고 누에를 치거나 비단을 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고드랫돌을 넘기며 자리를 짜거나 새참을 먹는 모습, 다림질을 하거나 개울가에 앉아서 빨래하는 모습 등 살림을 하는 여성들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성이 책은 일상의 모습, 사는 모습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는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본능은 어떤 형태로든 표출되거나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리학에 옭매인 조선 여성들에게도 성(性)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책에는 현대 사회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불륜과 일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림 왼쪽의 소복 입은 여자는 과부가 분명하고, 오른쪽의 붉은 저고리를 입은 여자는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것으로 보아 결혼하지 않은 처녀다. 과부와 처녀는 개 두 마리가 짝짓기 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신윤복의 그림과 제재가 동일하지만, 그림의 수준은 매우 떨어져 성적 분위기만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본문 330쪽)이로 하여금 조선 시대 여성들도 성에 대한 가치관이 있었고, 그에 따른 각자의 욕구 표출 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강명관 씀 | 휴머니스트 | 2012. 04. | 2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