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이 있다.
사랑할 때는 프랑스어로, 욕할 때는 네덜란드어로, 노래할 때는 이탈리아어로, 신을 논할 때는 독일어로, 사냥을 할 때는 핀란드어로, 축제를 벌일 때는 스페인어로, 여행할 때는 스웨덴어로, 사업할 때는 영어로 하라.
일견 타당한 말 같다. 유명한 오페라는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불려지고, 신학사상에 대하 조예는 미국보다 독일이 훨씬 깊고, 그 어떤 말보다 프랑스어가 입에서 녹아나듯 부드럽게 들리는 까닭이다. 그리고 '더치 페이(dutch pay)'라는 말도 실은 네덜란드어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는 서로 다른 유럽언어에 대한 유럽인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말이다. 네덜란드어가 욕할 때 쓰는 언어라는 편견은 영국이 네덜란드를 깎아내리고자 한 뜻에서 비롯된 말이었으니까. 더욱이 독일어가 신을 논하는 언어로 적합하다는 것도 루터의 종교개혁과 연관하여 비롯된 것이니까.
따지고 보면 27개 회원국을 둔 유럽연합(EU)은 다언어주의(multilingualism)를 표방하고 있다. 어느 나라 말을 더 우위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구 37만 명이 사용하는 몰타어가 EU의 공식어로 인정받는데 반해, 700만 명이 사용하는 스페인 내 카탈루냐어는 공식어가 아닌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 누리는 영향력은 대단한 셈이다.
조명진의 <유로피안 판도라>는 유럽연합(EU)의 국민성, 언어, 창의성, 왕실전통, 유럽통합, 대중문화, 그리고 스포츠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유럽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점을 전한다. 그야말로 유럽연합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예술의 속살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을 견제하고 중국에 맞설 대항마 키우는 유럽연합"유럽 5개국의 창의성을 살펴보았는데 진정한 유럽 연합은 경쟁력은 27개 회원국들의 다양한 창의성을 얼마나 잘 통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축을 이룬 에어버스가 초대형 여객기(A-380) 사업에서 미국의 보잉을 앞지른 이유가 바로 다양한 창의성의 통합과 기술 혁신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45쪽)이는 유럽의 '드림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유럽 연합은 언어와 국민성과 문화와 경제까지도 차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연합한 건 미국의 일국체제와 경쟁하기 위함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은 제품을 구상하고, 이탈리아 사람은 디자인을 맡고, 독일 사람은 제작하고, 프랑스 사람은 포장을 해서, 영국인이 마케팅을 맡는다는 이야기도, 그런 배경 속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서로의 장점으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게 그것.
"발렌베리 가문은 1938년 이래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DP)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복지사회 실현을 가능케 한 발판이 이 두 집단의 협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장기 집권해 온 사민당과, 대를 물리며 전략산업에서 기업 활동을 해온 발렌베리 가문의 안정된 공조체제야말로 스웨덴 모델의 핵심이다."(114쪽)이는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가문은 5대에 걸친 세습을 했어도 오히려 스웨덴의 국민과 여론으로부터 경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의 복지국가를 그 가문이 도맡고 있다는 뜻이다. 가히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주역인 셈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삼성가문도 그 가문을 부러워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2003년 7월에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임원단을 만났다고 한다. 삼성도 그 가문의 공조체제를 본받으려 한 까닭일까?
그처럼 유럽연합은 각 국의 창의성과 협력을 바탕으로 미국을 견제하고, 또 중국에 맞설 대항마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통일된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게 큰 약점일 것이다. 현재 EU가 23개 언어를 공식어로 채택함에 따라 통번역에 드는 연간 예산도 10억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1조 5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유럽의회도 785명에 달하는 유럽 국회의원들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60명의 통역사를 고용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또 다른 약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인한 도미노 현상의 현실화라든지, EU 확대와 터키 가입 문제, EU의 탈퇴와 잔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의 선택, 그리고 EU 내 주도권 경쟁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유로화로 인한 갈등도 꽤나 큰 골칫거리라고 하니, 2011년 7월부터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을 발효한 우리로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