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시티 인허가 로비사건'을 수사해 온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지난 18일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은 불구속 기소했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며 현 정권의 실세로 군림해온 최 전 위원장은 감방생활을 하게 됐다.
검찰이 기소한 만큼 최 전 위원장은 조만간 정식재판에 회부될 것이며, 만약 유죄 판결이 나면 철창신세를 져야 한다. 그런데 어쩌면 최 전 위원장은 감옥 대신 병원에서 수감생활을 대신할지도 모르겠다. 최 전 위원장은 지난 23일경 서울삼성병원에서 심혈관 수술을 받았다. 이날 최 전 위원장은 법원에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해놓고 그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치소 밖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이다.
최 전 위원장은 수술을 받은 후 장기간 병원생활을 할 가능성이 크며, 경우에 따라서는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는 불과 20여 일간만 수감생활만 하게 되는 셈인데 이를 두고 그가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영포라인'의 좌장 격이자 '방통대군'으로 불리며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였던 그도 이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얼마 뒤 어쩌면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두하는 그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이런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다. 과거에도 정·재계 인사들 가운데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앞두고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또 재판 중에 큰 수술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거나 혹은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와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도 여럿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감옥에서 나오면 중병도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낫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거짓으로 엄살을 부렸다는 얘긴데 그런 예는 비단 근자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더러 있었다.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된 지 50년이 된 지난 1999년, 필자는 반민특위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했던 인사들을 인터뷰해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삼인)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그때 만난 분들로는 반민특위 총무과장(현 사무총장) 이원용, 반민특위 특경대 부대장 이병창, 반민특위 출입기자 조덕송·오소백,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김정육, 그리고 반민특위 서기 임영환씨 등 모두 6명이다(* 이원용, 조덕송, 오소백씨는 작고함).
"경제계 사람들은 감옥 생활을 못 참아요"
이들 가운데 반민특위에서 서기를 지낸 임영환(1924년생)씨의 연락처를 알아내기가 가장 쉽지 않았다. 직위가 낮다 보니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낮았기 때문인 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임 선생이 검찰 계통에 오래 종사했다는 얘기를 듣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다행히 연락이 닿았는데 당시 서소문 근처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과 달리 임 선생은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였다. 그 이유는 반민특위에서 별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또 별로 할 얘기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차례 사무실로 방문해 설득한 끝에 겨우 인터뷰를 허락받았는데 말문이 열리자 당시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술술 증언해 주셨다. 당시 임 선생은 총무과 산하 영장계에서 영장 업무를 담당하면서 피의자들의 신변 처리와 형무소 생활을 관찰하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고 했다. 임 선생은 반민 피의자 가족들이 뇌물을 갖고 와서 청탁한 얘기, 형무소에 수감 중인 피의자들의 수형 자세, 특히 박흥식 등 경제계 출신 피의자들이 감옥생활을 못견뎌하더라는 얘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그 한 대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피의자들의 수형생활 실태가 어땠습니까?"소위 정치 분야 사람들은 수형태도가 단정합디다. 몸자세 등이."
-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최린씨라든지..."
- 그러면 다른 분야 사람들은요?"그런데 경제계 사람들은... 박흥식씨라든지, 김금술씨라든지, 뭐라고 할까, (감옥생활을) 못 참아요. 노상 아프다, 배가 고프다, 원기가 없다, 뭐 이런 식이죠. (두 그룹이) 영 (수형태도가) 다릅디다. 그때 알았어요. 똑같이 나라 팔아먹고 친일을 했어도 그 사람하고 그 덕에 돈 번 사람하고는 사회 태도가 다르더군요. 확실히 알았어요. (경제 분야 피의자는) 옆에 가면 뭔가를 잔뜩 쌓아 놨어요."
- 무엇을요?"그 뭐 사과, 계란..."
- 감방 안에 있으면서요?"예"
- 박흥식씨 같은 사람 말입니까?"예"
- 그런 걸 누가 (외부에서) 넣어 줄 수 있었습니까?"그때 그런 거 제재 안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형무소 측 하고 얘기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때 먹는 것은 제재 안했습니다. 하여튼 건강해야 조사를 하지 않습니까? 뚜렷이 (두 그룹이) 양분이 됩디다. 돈 번 사람(경제 분야 반민 피의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오히려 건강이 괜찮았는데... 갑자기 거기(감방)에 넣어 놓으니까 신체에 변화가 온 것도 있었겠지요." - 엄살도 있었겠지요."내가 보기엔 엄살입니다. 동정을 바라더군요."
(* 참고로, 등장인물 가운데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이나 나중에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등을 지냈으며, 박흥식은 친일 기업인의 상징으로 화신백화점과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 사장을 지냈다. 또 김금술은 악질 모리배로 일제에 비행기 헌납을 한 친일파임)
지난 2007년 9월 12일자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칭병(稱病)'을 구실로 위기를 모면하는 한국 재벌의 행태와 이들에게 온정적인 한국의 사법제도를 비판하는 특집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FT는 이날 '한국 재벌총수들은 곤란할 때마다 휠체어를 탄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위기를 모면한 재벌들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우리로선 창피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재계 인사 가운데 휠체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사람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FT에 소개된 사람들을 포함해 몇몇 유명 인사들이 휠체어를 '애용'(?)한 사연을 살펴보기로 한다.
유명인사들의 휠체어 애용사례, 살펴보니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최근 국세청에 의해 숨겨둔 땅이 발각돼 압류조치를 당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소위 '한보비리사건'으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 사건은 1997년 1월 발생한 한보철강의 부도와 이에 관련된 권력형 금융부정 및 특혜 대출비리사건으로,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운영차장 김기섭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에 증인으로 나오면서 정 전 회장은 흰색 마스크에 휠체어를 타고 출석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2004년 말 MBC 이상호 기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안기부 X파일사건'은 1997년 대통령선거 당시 삼성그룹의 고위 임원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특정후보에게 대선자금 불법지원 공모 및 검찰간부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이다. 이 일로 <중앙일보>는 사과 사설을, 삼성그룹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였으며 당사자인 홍석현 당시 주미대사는 자진사퇴하였다. 또 헌정사상 최초로 국정원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벌였으며, 전 국정원장인 신건, 임동원씨가 불법도청 공범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2005년 이 사건이 한창 수사 중일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이례적으로 5개월 동안이나 체류하였는데 귀국하면서 휠체어를 타고 공항에 나타났다. 당시 이 회장은 건강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2006년 4월 28일 비자금 조성혐의로 구속 수감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구속 두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초 정 회장은 2007년 2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과 함께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강연·신문기고 등의 사회봉사활동을 명령받았다. 검찰의 상고에 대해 대법원은 2008년 4월 집행유예 및 사회봉사명령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면서 금전 출연의 사회봉사명령은 허용될 수 없고 강연과 기고 부분도 취지가 분명치 않고 그 의미나 내용이 특정되지 않아 헌법이 보호하는 피고인의 양심의 자유에 중대한 침해를 초래할 수 있어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정 회장 역시 재판 과정에서 휠체어를 탄 채 법정에 등장해 여론의 따가운 비난을 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은 차남이 유흥주점에서 폭행당한 데 분노해 직원과 폭력배들을 동원해 '보복폭행'을 함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한 김 회장은 항소심 첫 공판에서 휠체어에 환자복을 입고 법정에 나왔다. 이날 변호인은 김 회장이 "심한 우울증과 충동 조절장애, 기관지염 등을 앓고 있으며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급격히 악화됐다"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2007년 9월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김 회장은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과도한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회공동체 일원으로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자세로 땀을 통해 이 사건 범행을 속죄할 수 있도록 복지시설·단체에서 대민봉사 활동을 명한다"고 밝혔다.
[이선애 태광그룹 상무] 태광그룹 비자금 의혹의 핵심인사로 지목돼 검찰 출두를 명받은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어머니인 이선애(84) 전 상무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두 번이나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다 강제소환 경고를 받고서야 2011년 1월 12일 서울 검찰에 출두했다. 이날 이 상무는 응급실 간이침대에 누운 채 검찰청사로 들어섰다. 준비한 휠체어는 타지 않았으나 흔히 병원에서 쓰는 하늘색 담요로 몸을 덮은 채 영락없은 환자 꼴이었다. 이씨의 이런 모습에 대해 검찰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그간 휠체어 환자 모습으로 검찰에 출석해 동정여론을 일으키려 했던 정·재계 인사들을 담은 스크랩을 언론에 배포했다. 이듬해 2월 1심에서 이씨는 84세 고령에도 징역 4년에 벌금 20억 원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권노갑 전 의원] 동교동계의 좌장으로 불린 권노갑 전 의원은 수뢰혐의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감옥생활을 했다. 우선 1997년 2월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으로부터 2억5000만 원 수수한 혐의로 구속 수감돼 1심 재판에서 징역 5년 선고 이듬해 8·15특사로 사면 복권됐다. 2002년 5월엔 MCI코리아 대표 진승현 씨로부터 5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추징금 5000만 원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인 당뇨병 때문에 법원의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석방됐으며, 2003년 7월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3년 8월 '현대 비자금' 200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 및 추징금 200억 원을 선고받은 권 전 의원은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징역 5년을 유지하고 국민주택채권 50억 원 몰수 및 추징금 150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날 그는 병보석 신청자가 입는 파란색 줄무늬 수의에 흰 수염을 기른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했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의원] '현대비자금 150억 원 수수혐의'로 대북송금사건을 다룬 송두환 특검팀에 의해 2003년 6월 구속된 박 의원은 2004년 11월 대법원이 현대로부터 150억 원을 수수했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대북 불법송금과 대기업 자금 1억 원 수수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2007년 2월 특별사면조치로 형집행이 면제되었고, 그해 12월 복권되었다. 2004년 대북송금사건 결심공판 때 마스크와 안대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두한 박 의원은 "하나 남은 눈마저 잃을지 모르니 구속집행 정지를 해 달라"고 재판부에 읍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