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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누구래요?"
또 한 여자가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이거 참 큰 야단났네. 시체를 이고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나 그래. 재수가 없을래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금방 시체에서 썩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이 여자는 계속 진저리를 치며 아예 말대꾸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있던 세 여자는 비로소 자기들 바로 위층에 시체가 누워있다는 가정을 제각기 실감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일인 것이다. -<외면하는 벽> 중에서

조정래 소설집 <외면하는 벽>(해냄 출판사 펴냄) 한 부분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것은 우리나라 아파트 보급률이 서서히 높아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입에 아파트에 살고 있음이 어떤 특권처럼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1978년이다.

 <외면하는 벽>
<외면하는 벽> ⓒ 해냄
13평짜리 작은 아파트에 어느 날 저녁, 심상치 않은 곡소리가 들려온다. 305호의 노인이 죽은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술렁인다. 그리하여 이웃들은 통장을 앞세우고 그 집에 몰려가 법을 들먹이며 울지 말 것, 어서 빨리 장례를 단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온기도 채 식지 않았을 다음날 이른 새벽인 6시에 장례가 끝난다. 

전혀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평소에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사소한 불편이라도 겪게 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매몰차게 몰아세우고 마는 그 각박한 현실을, 한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체온이 식기도 전에 몰아내기 급급한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을 통해 들려준다.

소설 속 각박함과 메마른 인정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과 무엇이 다를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때보다 우린 훨씬 더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다가 문득 '한 고층 아파트 주민들이 신문이나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들과 택배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함으로써 더 내야하는 전기요금이 부당하다고 생각, 이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올 4월 어느 날의 뉴스가 떠올랐다. '그래봤자 한 집에서 돈 천원 더 낼 정도에 불과할 건데 어찌 저리 인정머리도 없고 야박할까나'의 생각에 씁쓸하게 본 그 뉴스가.

"아니, 잰 누구니? 아이노꼬 아냐?"
여자가 창규를 손가락질하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응, 얘 말야? 나 아는 사람 앤데 자기가 바쁘다고 대신 구경 좀 시켜달래기에 데려왔다."
"그래? 너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니? 얼마나 친한 사인진 모르지만 다신 그런 부탁 듣지 마라 얘. 남들이 보면 네 자식인줄 안다."

(줄임)엄마도 자기를 손가락질하거나 구경거리로 삼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때의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생이 된 다음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그런 행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그 한마디가 준 충격과 서러움은 끝없이 넓은 외로움의 바다에 자신을 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전과는 달리 코로 입으로 맵게 물을 들이켜야 했다. 헤엄칠 힘을 이미 잃어버렸던 것이다. -<미운오리새끼>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그리고 가장 아리게 읽은 <미운오리새끼> 한 부분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예뻐)한다' 등으로 흔히 표현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소설 속 엄마는 창규를 제자식이 아니라고 아주 오랜 세월 끝에 만난 어떤 여자에게 둘러대고 만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기 전과 달리 전혀 모르는 남인양 어린 창규가 따라가건 말건 성큼성큼 내달아 가고 만다.

이 부분을 읽으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부모가 부끄러워 지레 외면하거나, 도망치거나, 그냥 아는 사람이라며 둘러대는 어떤 자식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식들은 부모를 부끄러워해도 그런 자식을 부모들은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그 모습이 되도록, 그 모양으로 헌신해 온 것처럼 변함없이 헌신을 다한다던가.

부모의 자식사랑이 그렇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런 부모 중 한 사람인 창규 엄마는 그 아들을 이처럼 제자식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한다. 왜? 그녀는 양공주이고, 창규는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흔적인 혼혈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전혀 다른 피가 섞였음을 피부색과 눈동자, 머리색으로 명확하게 증명하며 태어난.

"떼엑끼 순, 당장 나가! 그따위 시커먼 손으로 음식 그릇을 만지고 나르겠다는 게야? 어떤 손님이 입맛 나겠어. 내 장사 망치기 전에 당장 나가!"
"글쎄, 아니고 기고 다 집어 쳐. 미안하지만 싹 꺼져줬음 좋겠어. 우리 일자릴 깜둥이한테 손톱만큼이라도 빼앗길 수는 없다 이 말씀이야. 알아 잡수셨어?" - <미운오리새끼> 중에서

혼혈아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외국으로 입양되어 떠난다. 소설 속 숙희나 동수, 창규, 애리샤, 보비 등처럼 어린 것을 차마 뗄 수 없어 키울 경우 놀림속에 자라남은 물론, 어른이 되어도 우리 사회의 벽 앞에 좌절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여자친구인 숙희가 성인이 되어 결코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꿈을 접고 창녀의 길을 택하자, 돈을 벌어 숙희를 윤락에서 빼내겠다고 다짐하는 동수는 피부가 까맣다는 이유만으로 일을 구하러 가는 곳에서마다 이처럼 거절 당한다. 그리하여 동수는 결국 강도가 되고 만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인의 피가 흐르기에 그나마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는 창규와 달리 흑인의 피가 섞인 숙희와 동수의 비극 외에 남자에게 농락 당한 후 버려지는 애리샤의 이야기 틈틈이 이들의 어머니인 양공주들의 비극적인 삶을 섞어 들려주는 방법으로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 그처럼 살았던 혼혈아들과 그 어머니들의 비극을 아릿하게 들려준다.

1970년대 말, 유신의 탄압은 더더욱 가혹해지고, 잘 살고자하는 욕구를 먹이 삼아 노동착취는 갈수록 심해지고, 아파트로 상징된 도시의 밀집된 삶은 서로 서로를 버리고 외면하며 몰인정한 세상으로 치달아가고….참 살벌하고 적막한 세월이었다. 그런데 2010년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세월의 강이 흘러 흘러 장강이 되었으니 살만한 세상이 되었는가. 우리가 좀 더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작가로서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저 70년대 말의 상황을 상상해 가며 여기 실려 있는 작품들을 읽어나가면 독자들께서는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찾게 되지 않을까. - 작가의 말 중에서

<외면하는 벽>은 작가가 1970년대에 쓴 작품 일부를 모은 것으로, 1999년에 나온 <마술의 손>(이 책 5번째) 개정판이다. 작가는 이 개정판의 출간 이유를(작가의 말) '우리는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이처럼 말한다.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났다. 그러나 아마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그때와 시대적 배경도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도 지금과 전혀 다르지만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소설 속 주인공들을 좌절하게 한 그 벽은 여전하다는 것을.  아니 혹자들은 도리질을 할지도 모르겠다. "발전과 풍요만큼 그 벽이 더욱 높고 더 견고해진 것 같다"며.

외에 사상범으로 몰려 암벽 감옥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버텼던 자의 좌절을 그린 <비둘기>, 굶주린 동생을 먹이겠다는 일념만으로 묵인한 한 소녀의 성적 고통, 그 결말을 다룬 <한, 그 그늘의 자리>, 아버지가 병신이 되자 바람이 나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아 나선 어린 동호가 만나는 야비한 세상을 그린 <진화론>, 산골 마을에 어느 날 전기와 함께 보급되기 시작한 TV 때문에 벌어지는 변화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를 다룬 <마술의 손>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이런저런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마는 사람들의 고통과 비극 8편이 실려 있다.

덧붙이는 글 | <외면하는 벽>ㅣ조정래 소설집ㅣ해냄 출판사ㅣ2012-4-30ㅣ값:13800원



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해냄(2012)


#조정래#마술의 손#태백산맥#아리랑#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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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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